[Opinion] 죽여야 하는 형과 죽을 수밖에 없는 동생이라면 그 책임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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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와 우리나라의 역사가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두 나라 모두 옆 나라의 지배와 핍박을 받았고, 이 시간은 분단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영국이 아일랜드를 지배한 역사가 훨씬 길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보면 우리나라와 겹쳐 보이는 부분이 많다.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평범한 마을을 헤집고 다닌다거나, 고유의 언어를 못 쓰게 하며 행패를 부린다거나.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The Wind That Shakes Barley, 2006) 또한 아일랜드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아직 아일랜드의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1920년, 주인공 ‘데미언’은 형 ‘테디’와 함께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리더십이 있는 테디와 머리가 좋은 데미언은 힘을 합쳐 조국을 위해 힘쓰지만,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불완전한 평화 조약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며 대립하기 시작한다.
테디는 지금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완전할지언정 임시적인 평화라도 얻어야 한다는 조약 찬성파, 그러나 데미언은 지금 양보해서는 완전한 아일랜드를 절대 돌려받을 수 없기 때문에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조약 반대파이다. 한마음 한뜻으로 싸우던 아일랜드 독립군의 대립은 점차 과열되고 결국 형제는 메마른 처형대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테디는 찬성파에 체포된 데미언에게 반대파 동료들의 위치를 불면 살려주겠다고 말하지만 데미언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 형은 밀고하지 않는 동생을 사살해야 하고, 동생은 밀고할 생각이 없다.
역사를 다루는 작품의 문제점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기 쉽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자국의 역사가 아닌, 잘 모르는 역사여도 그렇다. 다른 공간, 다른 시간의 이야기인데도 왜 그리 닮은 점이 많은지. 특히 비극을 다룰 때 더 닮았다. 행복한 장면이 나와도 이 상황이 이후의 아픈 장면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줄 장치라는 생각에 마음놓고 즐거워할 수 없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몇 안 되는 행복한 장면으로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소박한 파티가 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춤을 춘다. 데미언과 그의 연인 ‘시네드’는 단둘이 있는 공간으로 가 시네드 머리 위의 하얀 베일을 걷어내며 입을 맞춘다. 파티 속에 이뤄지는 둘만의 작은 결혼식처럼 보이는 낭만적인 장면이지만 이 장면은 행복하거나 즐겁기보다는 앞으로 얼마나 더 큰 고난이 올지 암시하는 장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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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테디는 데미언을 제 손으로 죽인다. 반대파 한 명이 찬성파 한 명을 우발적으로 죽여 서로의 적대감이 치솟은 상황에서 데미언이 찬성파의 무기고에 침입했다가 구속된 참이었다. 테디는 조약 찬성파 군대의 높은 위치에 있었고, 동생이라는 이유로 데미언을 규정대로 다루지 않는 것은 그의 신념에도, 군대의 사기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해 보지만 사실 테디가 꼭 데미언을 죽여야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는 않는다. 엄연히 말해 찬성파와 반대파는 적이 아니라 잠시 뜻이 달라진 동료이다. 게다가 테디와 데미언은 다른 누구도 아닌 피를 나눈 친형제인데, 꼭 그렇게 극단적이고 잔인한 행동을 해야 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는 그런 선택을 하는 테디가 원망스럽고 또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와 생각을 메모하면서는 정반대의 감상이 들기도 했다. 동생을 죽인 테디가 아니라, 형이 자신을 죽이게끔 내버려둔 데미언이 더 잔인한 게 아닐까. 둘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 상황 끝에 남겨진 것은 테디 하나다. 데미언은 하다못해 협상하거나 도망치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형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 믿어서가 아니라, 형은 자신을 죽일 테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옳은 일이니 말리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데미언은 형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신념만을 위하는, 저에게 가장 편한 선택을 했다. 최소한의 선택만 자신이 하고 나머지 결정적인 선택과 책임은 상대에게 모두 맡기는 그의 회피가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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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언이 더 가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다른 사건에 있다. 데미언도 동료 한 명을 직접 사살한 적이 있다. 다른 동료들의 위치를 밀고해 사형 당하게 만든 배신자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사실 그는 배신자라기보다도 겁을 먹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유언을 남기라는 말에 변명하지도 않고 살려달라 빌지도 않고, 엄마에게 제 무덤의 위치를 알려달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동네 아이였다. 데미언은 괴로워하면서도 방아쇠를 당겼다. 아마 이 장면을 먼저 보았기 때문에 친동생을 죽이는 테디의 선택이 충격적이면서도 놀랍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죽음을 맞이하는 데미언이 시네드에게 남긴 유언은 편지의 독백 형식으로 영화에 나온다. 데미언은 제 형인 테디가 자신을 죽이고 나서도 괜찮을지 모르겠고 실은 지금도 괜찮은 상태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시네드에게 테디를 챙겨줄 것을 부탁한다. 데미언 그 자신도 가까운 사람을 직접 죽여본 적이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이 평범하게 들리지 않는다. 죽는 사람만큼이나 죽이는 사람에게도 크나큰 고통이 지어짐을 데미언은 경험으로 안다. 그럼에도 데미언은 같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형을 내버려둔다.
데미언이 시네드에게 남긴 말, ‘괜찮은 상태인지 모르겠다’는 것이 형 테디인지, 데미언 저 자신인지 알 수 없다. 저 문장 하나만 놓고 보면 데미언이 아이를 죽인 일의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극단적인 회피 행동을 한 게 아닌가, 즉 소극적인 형태로나마 제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떠오른다. 영화 전체에서 데미언이 정신적으로 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일은 많지 않아 나 스스로도 이런 해석은 비약이라고 생각하지만, 과거의 그 행동이 데미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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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십여 년 전의 작품이지만 얼마 전 있었던 켄 로치 감독 전을 통해 처음 보았다. 감독 특별전인 만큼 해당 감독의 영화가 몇 편 더 함께 걸려 있었고, 그날은 켄 로치 감독의 작품을 두 편 연달아 보았다. 하나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의 올드 오크>(The Old Oak, 2024)였다. 두 영화는 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나의 올드 오크>에 나오는 대사 하나가 전체 사회를 관통하고, 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까지 향한다고 느꼈다.
“삶이 힘들 때 우리는 희생양을 찾아. 절대 위는 안 보고 아래만 보면서 우리보다 더한 약자를 비난해. 언제나 그들을 탓해. 약자의 얼굴에 낙인을 찍는 것이 더 쉬우니까.”
우리는 문제를 마주할 때 그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찾고 해결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당장 화풀이할 수 있는 상대를 탐색해 매도하고 임시적인 우위를 얻어서는 안주한다. 아일랜드 독립군의 분열도 어쩌면 여기서 시작되었을지 모르겠다. 실은 이 글에서 내가 원망의 화살을 형 테디에서 동생 데미안으로 돌린 것도 그 예 중 하나다. 원망의 화살이 과연 테디, 또는 데미안을 향하는 게 맞을까.
본인의 손으로 죽인 아이의 유언을 전달하기 위해 아이의 어머니를 찾아간 데미언에게,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다시는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데미언은 이 이야기를 연인 시네드에게 털어놓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데미언의 연인 시네드 또한 그 어머니와 똑같은 말을 입에 담게 된다. 시네드는 데미언의 유언이 담긴 편지를 전하러 온 테디에게 다시는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의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씀하셨다지만 시네드는 토해내듯 처절하게 말한다.
이 장면을 통해 죽이는 사람에서 죽는 사람이 된 데미언의 대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뚜렷한 악인을 설정하거나 개인을 비판하기보다는 사회 곳곳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는 그림자를 보여주기를 선호하는 감독의 작품 성향을 생각할 때, 이는 데미언의 행동을 비난한다거나 인과응보라며 냉소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냥 이런 일이 일어날 만큼 잔인한 시대였고, 가혹한 상황이었고, 그 순간을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김지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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