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 뮤지컬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보길 바라는 이유. - 뮤지컬 ‘브론테’

글 입력 2024.03.3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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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고전 명작들의 내용을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제목밖에 없다.


이번에 뮤지컬 브론테를 본 후, 고전 명작을 다시 읽어보거나 그것도 어렵다면 줄거리라도 다시 관심을 기울여 살펴본 후, 머릿속에 저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명작의 줄거리를 다 저장하지 못하면, 브론테 자매의 작품은 꼭, 머리에 저장해야겠다.


사실 이런 다짐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그럼에도 여태껏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까닭은 고전 명작들의 내용은 (감히)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한 마디로 고전의 내용에 흥미를 못 느낀 거다. 혹시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면, 뮤지컬 브론테를 꼭 보았으면 한다.


‘브론테’는 여성이 글을 쓸 수 없는 빅토리아 시대에 살면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브론테가의 세 자매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이다. 빅토리아 시대에 살았던 여성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결혼과 가정교사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세 자매는 금지된 글쓰기를 계속해 왔으며, 서로 비평을 해주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녀들은 여성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에서 글쓰기를 통하여 자유를 얻고자 했다. 한 핏줄이지만 세 자매는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다. 그럼에도 세 자매에게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도전적인 시대를 앞서나가는 여성이라는 점이다. 금지된 것을 몰래 하면서도 발각될까 봐 불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겼다.


세 자매는 노력 끝에 명작을 남기게 되는데, 그 명작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제인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 다. 고전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부터 작가 또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보면 대사와 씬 하나, 하나에 공감하며 볼 수 있다.


자매간의 우애와 갈등, 장녀와 막내의 고충, 현실과 꿈의 충돌, 꿈을 향한 간절함과 열정, 가족의 사랑까지 그려낸 작품이라 고전소설이나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을 거라고 본다. 성향과 상황, 나이에 따라 해석하는 메시지도 다를 거라 예상되므로 좀 더 다양하게, 많은 사람이 관람하길 바라고 있다. 연출과 넘버 그리고 배우들의 가창력, 화음, 연기력까지 최고였기에 볼거리와 들을 거리도 많다. 초연 당시 인기가 상당했던 거로 아는데, 더 널리 알려지고 더 많이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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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는 혜화역 인근에 있는 링크아트센터드림에서 열렸다. 혜화의 대학로 극장보다는 크지만, 소극장이어서 1층에 앉으면 어느 좌석이든 무대가 잘 보인다. 뮤지컬이나 연극을 볼 때 연출을 눈여겨보는 편인데, 특히 뮤지컬은 연출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브론테’는 소극장에서 열렸지만, 대극장에서 볼 법한 연출을 보여줬다.


‘브론테’는 밴드가 연주했는데, 가장 중요한 인물의 감정선을 잘 표현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완전히 다른 세 자매의 성격과 글 쓰는 스타일을 음악으로 표현한 점이었다.


세 자매가 각각 자신만의 공간에서 글을 쓰는 씬에서 샬롯과 에밀리에게는 빠르고 강한 비트의 연주가 들렸다. 두 음악이 비슷했지만 귀 기울여 들으니, 차이가 있었다. 샬롯의 배경음악은 절정으로 향해 가는 감정과 날이 선 샬롯의 모습이 연상되는 선율이 돋보였다. 에밀리의 배경음악은 우울하고 어둡고, 점점 파멸하는 느낌의 선율이었다. 어느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들었던 악마의 곡이 떠오르기도 했다. 앤의 배경음악은 첼로의 솔로 연주가 돋보였는데, 샬롯과 에밀리 뒤로 빠른 비트의 연주가 이어지다가 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되자 갑자기 리듬이 느려지고, 선율이 부드러워졌다. 두 언니의 음악 분위기와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서 감탄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주 하나로 배우의 감정뿐만 아니라 성향까지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음악이 인물을 표현했듯이 조명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에밀리가 점점 파멸하는 씬에서 무대 사이드에서 관객석 쪽으로 퍼지는 조명은 천재적인 재능과 내면을 잘 표현해 줬다. 소극장의 한계를 뛰어넘은 순간이었다.


음악과 조명의 연출도 좋았고, 그림자를 활용한 연출도 인상 깊었다. 독특한 연출이라 더 기억에 남았다.


세 자매는 자기 소설을 낭독하고, 서로 첨삭을 해주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가졌다. 세 자매가 쓴 소설 속 상황을 그림자로 표현했는데, 신비로웠다. 그림자에 집중하니 그 소설에도 몰입이 돼서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그림자 연출은 극의 후반부에도 나왔다. 이상한 편지로 인해 점점 변하는 샬롯의 내면을 그림자로 표현했다. 개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며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그림자였는데, 마치 샬롯의 양옆에서 유혹을 속삭이는 악마의 모습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감독은 음악, 조명, 그림자 그리고 세 자매와 분신과도 같은 흰 천을 통해 인물들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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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인물들은 글쓰기를 방패 삼아 힘든 상황과 여성의 자유를 빼앗긴 시대를 씩씩하게 극복하며 산다. 세 자매는 잘 싸우지만, 잘 화해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했다. 우애가 좋은 자매였다. 같은 걸 좋아하고, 같은 꿈을 꾸면서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 샬롯은 우연히 에밀리가 쓴 시를 보고 동생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본다. 샬롯은 동생의 글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앤과 함께 출판을 하자고 에밀리를 설득한다. 에밀리는 설득에 결국 넘어가고 남성의 이름을 필명으로 하여 출판한다. 하지만 딱 1권 팔릴 정도로 실적이 좋지 않았지만, 세 자매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에밀리는 자매에게 겪었던 일을 말한다. 이를 계기로 세 자매는 소설을 써 다시 출판하기로 한다. 한편, 에밀리가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낸 듯한 이상한 편지를 받은 후, 샬롯과 에밀리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고 앤은 언니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괴로워한다. 결국 샬롯은 집에서 나가고, 각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소설을 쓰고 출간한다.


샬롯은 ‘제인에어’로 주목과 호평을 받으며 성공했지만, 에밀리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글, 앤은 비유가 없다는 혹평을 받고 주목받지 못한다. 그러던 중 에밀리의 건강은 급격히 안 좋아지면서 결국 세상을 떠나고, 샬롯이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에밀리가 죽은 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샬롯은 앤까지 보내고, 혼자 남아 긴 세월을 보내다 결국 그녀도 삶을 마무리한다. 세 자매는 결국 자신이 썼던 소설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언니들이 일찍 죽어 얼떨결에 장녀가 된 샬롯은 동생들의 자유와 꿈을 지켜주기 위해 돈을 벌려고 했다. 내가 관람했을 때는 이봄소리 배우가 샬롯을 연기했는데 샬롯 그 자체였다. 이봄소리 배우의 단발머리가 장녀의 이미지를 나타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장녀의 상황과 내면을 잘 살렸다.


“난 이 세상에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라는 가사는 샬롯의 성격과 가치관을 그대로 나타냈다. 얼떨결에 첫째가 됐지만 장녀의 역할을 똑 부러지게 해내는 샬롯은 그만큼 책임감도 강하고 야무지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샬롯은 첫째 역할과 어머니의 빈자리까지 채워야 하는 상황임에도 씩씩하고 밝게 잘 해냈다.


극에서 샬롯을 독선적이고, 오만하다고 표현하는 대목이 있는데,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보다 동생들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동생들이 현실에 부딪혀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울타리가 되어줬다. 아마 그녀의 울타리가 없었다면 에밀리가 천재적인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없고, 앤은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었을 거다. 나는 세 자매 중 샬롯이 가장 안쓰러웠다. 원래부터 장녀인 사람도 그 자리가 버거운데, 샬롯은 갑자기 장녀가 되었으니 얼마나 부담이고, 힘들었을까.


자신도 어린데 동생들처럼 어리광도 못 부리고 강한 척을 해야 하고, 엄마의 빈자리까지 채워야 하니 고충이 많았을 거다. 어쩔 수 없이 지극히 현실적이어야 했던 상황에 샬롯은 현실과 꿈이 충돌하는 상황 또한 많았을 거다. 만약 샬롯에게도 울타리가 있었다면, 에밀리의 말처럼 세상의 기준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은 되지 않았을 거다.


에밀리의 재능을 알아보는 눈, 사회흐름과 대중의 마음을 파악하는 통찰력, 집을 나간 후 ‘제인에어’라는 소설로 성공, 당시에도 지금도 여전히 호평과 인기를 얻은 ‘제인에어’라는 점을 보면 샬롯에게도 에밀리만큼의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다. 다만, 그 재능을 온전히 끌어내지 못했을 뿐.


시대와 상황이 낳은 안타까운 인물이자 같은 첫째라 그런지 샬롯이 너무 안쓰러워서 안아주고 싶었다.


‘폭풍의 언덕’을 남긴 에밀리는 외로움과 고독에 괴로워했다. 그런 에밀리에게 어느 날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와 비난이 쏟아져도 멈추지 말고 너를 믿으라는 편지 내용은 빛과 같은 존재였을 테다. 글을 세상에 내보내서 성공해야 한다는 샬롯과 반대로 에밀리의 작품 가치관은 글을 쓸 수 있고, 내가 내 글을 알아주면 충분하다였다. 샬롯과 부딪히는 에밀리의 작품 가치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중이 좋아할 만한, 돈이 될 만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샬롯과 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을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는 에밀리는 계속 충돌했다.


에밀리는 자신의 재능을 끝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 샬롯의 말대로 소설 속 인물들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스스로를 놓아버렸다. 그래서 건강을 살피지 않고 자신을 글 속으로 몰아넣고, 무리하고, 병원도 가지 않았다. 결국 건강 악화와 무리로 인해 그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생각해 보면, 에밀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자신의 가치관을 가족조차도 이해해 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점점 더 고독해졌을 거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너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며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의 말에 더 광적으로 글쓰기에 전념했던 것 같다.


만약, 에밀리가 요즘 시대에 사는 사람이었더라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거로 생각한다. 방향은 다르지만, 샬롯처럼 에밀리도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사람들의 민낯, 사회의 부조리와 부당함을 꿰뚫어 봤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에밀리처럼 꿰뚫어 보고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좋게 보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더 고립되어 갔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경향이 있지만, 적어도 당시 시대보다는 현시대가 에밀리에게 더 나은 환경일지도 모른다. 샬롯과 에밀리는 빅토리아 시대가 낳은 비극의 인물이었다.


앤은 샬롯과 에밀리의 다툼을 중재하고, 화해시키며 언니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타적이고 따스하며,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을 가졌다. 앤이 썼던 소설에 천사가 나오는 부분은 앤의 성품을 그대로 나타낸다. 앤은 마지막에서 한 줄을 쓰지 못해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다가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완성했다. 앤이 계속 소설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언니들의 눈치를 보는 상황 그리고 샬롯의 말대로 회피하는 성향 때문이다. 회피가 아닌 직면을 하는 훈련이 잘 되어있는 인물이었으면, 소설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녹일 수 있었을 거다. 


앤은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훗날에는 교과서적이고 담백한 스토리와 문체로 인정받았다. 앤에게는 비유를 넣지 않아도, 자극적인 갈등 설정을 하지 않아도 문체와 글 실력만으로 최고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재능이 있었다. 그 재능에 앤의 성품도 한몫했다. 미사여구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표현했지만, 그녀의 따스하고 온화함이 색으로 입혀져 그녀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샬롯, 에밀리, 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달랐다. 세 자매를 연기한 배우들의 개성과 보이스도 달랐다. 그럼에도 어우러지고, 환상의 하모니가 만들어진 것처럼 세 자매는 함께 있을 때 가장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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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의 초반에서 언급한 점 외에 세 자매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다. 자신을 비난하는 말에 누구나 흔들릴 순 있다. 하지만 악마의 속삭임에 자신을 밀어 넣는 일은 스스로 글 실력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다. 마지막에 미래에서 이상한 편지를 보낸 사람이 샬롯으로 밝혀지는데, 샬롯은 과거의 자신에게 비난의 말을 적었던 거다. 스스로에게 비난을 하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지 보여줬다. 만약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자극적인 비난의 문장 대신, 진심이 담긴 충고의 문장을 적었을 텐데. 그렇다면 샬롯이 그렇게까지 괴로워하며 망가지지 않았을 거다. 


에밀리도 꼭 누군가가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자신을 믿고 사랑했더라면, 외로움과 고독에 숨 막히는 삶을 살지 않았을 거다. 앤도 회피하지 않고, 상황과 직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을 거다. 나도 글에 재능이 있다고 믿었다면, 에밀리가 들은 목소리에 집착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소설을 완성 시킬 수 있었을 거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지 못한 세 자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자매에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목사 아버지, 여성의 자유가 없었던 빅토리아 시대. 이 중 하나만 존재해도 단단하게 자라기 힘든데, 모든 것이 존재했던 상황에서 자기확신을 하고, 스스로를 사랑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을 테다. 관객석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으니 가슴이 아리고 서글펐다.


뮤지컬 ‘브론테’는 단순히 글쓰기를 사랑하는 세 자매의 삶, 작가들의 여정을 그린 극이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알려줬고, 자신을 믿고, 사랑하라는 응원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이것이 뮤지컬 ‘브론테’가 널리, 널리 퍼지고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길 바라는 진짜 이유다. 

 

 

 

필자의 tmi


 

미래에서 온 편지의 주인공이 샬롯이라는 반전이 드러나는 씬에서 참아왔던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극의 초반부터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꿈틀댔다. 공감 가는 대사도 많고, 세 자매의 글쓰기를 향한 간절함과 사랑이 너무 잘 느껴져서 자꾸 울컥했다. 그래도 잘 참고 있었는데, 결국 예상하지 못한 반전에 K.O 당했다.


샬롯은 왜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엄격했을까 생각이 들면서 혼자 짐을 짊어지려고 한 그녀의 삶이 너무 안타까웠다. 악역을 자처한다는 건, 참 고통스러운 일인데 샬롯은 장녀라는 책임감에 그 고통스러운 일까지 감내했다.


어떤 책에서 부모님의 잔소리 등 모든 말들이 “사랑해”였다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반전이 드러난 순간 샬롯이 동생들에게 했던 말들이 떠오르면서 “사랑해”로 들렸다. 


내가 첫째라 그런지 샬롯에게 이입이 많이 됐던 것 같다. 샬롯뿐만 아니라 에밀리와 앤에게도 크게 공감했다.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외로움, 자신은 보이지만 타인은 보이지 않아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고독, 가족조차 몰아가는 상황에 숨이 막히는 처지가 내 이야기 같았다. 


두 언니 사이에서 중재하고, 항상 눈치 보느라 자신은 뒷전이던 앤에게서도 내 모습이 보였다. 부모님의 다툼을 중재하고, 부모님과 동생의 감정들을 다 받아주느라 정작 나를 살필 수 없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회피형 성격이었던 과거의 내가 생각나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스스로를 다잡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샬롯, 에밀리, 앤 모두에게 공감하고, 글쓰기를 향한 그녀들의 마음이 뼈저리게 느껴져서 한번 터진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한편으로는 여성의 몸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건 매우 고마운 일이라는 걸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도 샬롯처럼 현실과 꿈이 충돌할 때가 많다. 상황이 힘들어질 때마다 ‘글쓰기를 포기할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 생각이 얼마나 복에 겨운 생각이었을까. 글을 가장 좋아하면서, 가장 만만하게 여겼던 걸까. 브론테 자매를 보며 내가 글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 첫 마음을 다시 되새겼다.


극 중 하나의 문장이 떠오른다.


“때론 모질고 때론 슬프기만 한 삶이었으나, 우린 우리의 이름으로 내내 치열했고, 존재했으므로 이미 충분했다. 또 어느 곳, 우리와 닮은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가 닿길 바라며”


그래, 지금 심적으로 힘들지만 그래도 큰 문제나 위험 없이 살고 있으며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나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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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득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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