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색의 해방’이라는 새로운 지평 - 크루즈 디에즈: RGB, 세기의 컬러들

크루즈 디에즈의 '색'이 새로운 이유
글 입력 2024.06.18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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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보고 와서 ‘색’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색이 두드러지는 노랫말들을 떠올려봤다. 사랑에 대해 말하기 마련인 대중가요의 노랫말에서 색은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그 미묘한 차이를 전달하는 효과적이고도 아름다운 표현 수단으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 이문세의 ‘붉은 노을’에서 붉은색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애타는 마음을 상징한다. 강수지의 ‘보라빛향기’에서 보랏빛은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 신비로움을, 레드벨벳의 ‘빨간 맛’은 한여름 태양처럼 뜨겁고 열정적인 어린 날의 사랑을 그린다.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도 색은 유사하게 인물의 특성이나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메타포로 활용된다.

 

이렇게 표현해 볼까? 색은 미묘한 뉘앙스를 직관적으로 감각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뉘앙스 nuance’라는 표현은 본디 색의 미소한 차이를 가리키는 프랑스어이다. 아마도 비유적인 용례가 점점 넓어지면서 오늘날에는 미묘한 차이에서 오는 느낌이나 인상 그 자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주로 쓰이게 됐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앞서 말한 문장은 재밌는 순환 논리가 된다. ‘색은 미묘한 색의 미소한 차이를 직관적으로 감각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말에서도 색은 비슷한 방식으로 확장된 의미를 내포한다. ‘다채롭다’, ‘총천연색’, ‘(~의) 색이 있다’ 등의 표현에서 색은 개성과 연결되며 특히 다양한 개성의 차이와 공존으로부터 비롯되는 다양성을 표현할 때 자주 소환된다.

 

이러한 내포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마 LGBTQ+ 커뮤니티의 무지개기(Pride Flag)일 것이다. 처음에 8개의 색 각각이 성별, 생명, 치유, 햇빛, 자연, 마법과 예술, 평화, 정신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안되었으나 다양한 이유로 오늘날은 6색기가 주로 쓰인다. 어쨌든 사람들은 무지개기를 통해 색 각각에 부여된 의미보다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퀴어 정체성과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까지가 공존하는 다양성의 사회를 자연스럽게 연상할 것이다.

 

좀 더 세속적인 영역을 들여다보자면, 색은 마케팅의 필수 요소이다. 브랜드를 색과 연결해 이미지를 각인시키거나, 제품 패키징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특성을 색으로 표현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이다. 한편 패션, 코스메틱 등 산업에서 색은 더욱 핵심적인, 재화의 사용 가치 그 자체가 된다.

 

유행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팬톤이 선정하는 ‘올해의 컬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2024년의 컬러는 피치 퍼즈(Peach Fuzz)로, 팬톤은 이 색에서 따뜻함, 포근함, 부드러움, 섬세함, 다정함, 포용, 배려, 협력, 공동체 등의 의미를 끌어낸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정서적 차원보다 올해의 컬러는 그해 상반기 트렌드를 이끌며 사람들의 미감을 조정하고 구매 욕구를 끌어내는 시각적 자극이 된다. ‘퍼스널 컬러’의 유행도 유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색을 자연스럽게 정서, 개성과 연결 짓는 데서 생겨나는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해 떠올려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색은 사람들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그건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단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색 그 자체에 대해선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색은 항상 색이 불러오는 주관적인 느낌과 연결되었을 때 의미를 갖는다.

 

미술계에서조차 색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바로 그 때문에 크루즈 디에즈는 “색상을 형태에서 해방”해 보자는 도발적인 탐구에 나선다. 그의 탐구 이전에 ‘색’ 그 자체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 쉽지 않았고, 그는 평생에 걸친 탐구를 통해 색의 본질까지 포착하는 색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가 빛과 색에 매료된 계기에서부터 이미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는 석양 아래 온 세상이, 나무와 하늘 모두가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색에 대한 충격을 받았으며, 그가 어릴 적 가장 좋아한 장난감이 연이었던 것도 밝은 하늘 위에 뜬 연에 비치는 색상의 투명함을 관찰하는 것이 그에게 흥미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색으로부터의 정서, 색이 발생시키는 개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익숙한 내게는 노을의 붉은빛은 이문세의 ‘붉은 노을’에서처럼 아름다워서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에 차라리 더 가까웠다. 그런데 크루즈 디에즈에게는 노을의 붉은 빛이 세상이 다른 빛으로 보이는 현상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 중요했다. 하늘빛에 투명해진 연도 상쾌하고 풋풋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달리 보이는 색채 자체를 탐구하는 것만이 그의 관심사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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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을 살펴보며 그는 예술가보다는 차라리 과학자라는 타이틀이 더 걸맞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자신을 “과학자의 학문을 적용하는 예술가”로 묘사했듯이 말이다. 그는 색을 자연스럽게,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두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감흥에 집중하는 것에서 벗어나 빛이 반사된 것을 망막을 통해 감각하고 색으로 인지하는 물리 현상의 생체 감각 과정 자체를 자신의 작품을 통해 감상자가 메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예를 들어 “색 포화(Chromasaturation)”라는 공간 설치 작품에서 빛의 삼원색으로 감싸인 공간에 들어가 보는 것은 단일한 색상의 빛으로 둘러싸이는 이질적인 경험 그 자체로도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이었으며, 또 전시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공간을 포토제닉하다고 느껴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또한 도슨트의 안내대로 크루즈 디에즈의 의도를 따라가 보면 ‘색 포화’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똑같은 공간에 투사된 동일한 빛을 시각이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이는지 신기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그의 다른 모든 작품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감상자가 색 그 자체에 집중하며 변화하는 색의 현상과 그것을 인지하는 과정을 생경하게 경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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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현상이 나의 오감을 통해 감각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생성된 정보가 객관적인 사실을 지시하리라는 어떠한 확신도 없다는 점을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느낀 감각, 인지한 사실, 거기에서 생겨난 정서가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색을 통해 느끼고 표현하는 정서와 개성은 여전히 가치 있다. 그러나 또한 크루즈 디에즈가 포착하고자 한 빛과 색을 인식하는 과정 그 자체를 기억할 때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지평을 한 걸음 더 확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일은 그래서 언제나 위대하다.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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