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쇼팽과 함께한 겨울 - 산울림 편지콘서트 '쇼팽, 블루노트'

글 입력 2023.12.2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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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겨울은 우울과 무기력의 계절이다. 남들보다 더위를 안 타는 대신 추위를 너무 잘 타서 밖에 나가기만 하면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움츠려야 하는 게 싫다. 나는 집에 있으면 곧잘 우울해지고, 밖에 나가야 에너지를 얻는 타입인데 겨울엔 따뜻한 이불 속을 나가기가 영 쉽지 않다. 이렇게 활동량이 줄어들면 사람이 또 무기력해지고, 설상가상으로 해도 빨리 져서 나의 우울은 정점에 달한다.

 

그렇지만 이런 내게도 겨울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있다. 함박눈도, 크리스마스도, 캐럴도 아니다. 바로 산울림 편지콘서트다. 작년 이맘때 산울림 편지콘서트의 <슈베르트, 겨울여행> 공연을 보고 한 음악가에 대해서 연극으로 그의 생애를 설명하고, 연주를 곁들이는 형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어떤 클래식 공연보다 음악가에게 진심으로 다가간 시간이었다. 다른 음악가도 이렇게 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매년 같은 형식으로 음악가만 바꿔서 진행된다니 기쁜 마음으로 내년을 기약했다.

 

어느새 일 년이 지나 다시 겨울이 찾아오고, 추워진 날씨와 함께 기다렸던 산울림 편지콘서트 소식이 들려왔다. 어떤 음악가일까 기대가 컸는데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쇼팽이라니,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일 년 만에 다시 찾은 산울림 소극장은 여전히 포근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작년엔 슈베르트라는 음악가에게 깊이 다가갔다면 이젠 쇼팽과 친구가 될 차례였다.

 

 

2023 편지콘서트_쇼팽 블루노트_포스터.jpg


 

 

외롭고 불안했던 예술가 쇼팽


 


쇼팽은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으로 ‘새로운 모차르트의 탄생’이라 불렸지만, 불안한 조국 폴란드의 정세와 자신의 음악적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인해 더 넓은 세상, 파리로 떠난다. 멘델스존, 리스트 등 동년배의 피아니스트들이 활동하고 있던 새로운 음악의 중심지에서 쇼팽은 당시 사교계의 스타이던 도발적이고 자유로운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산울림 편지콘서트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공연예술의 성지 ‘산울림’의 겨울 대표 레퍼토리 공연으로, 불멸의 음악가들의 삶과 음악을 클래식 라이브 연주와 드라마를 통해 재조명하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2023년의 편지콘서트 <쇼팽, 블루노트>에서는 쇼팽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의 회상으로 쇼팽의 삶을 회고한다.

 

쇼팽의 음악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에 대한 배경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다.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번 공연이 아니었다면 그가 폴란드 사람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유럽의 예술가에 대해 알아보면 대부분 출신 국가에서 벗어나 이방인으로서 활동하는데, 쇼팽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푼 꿈을 안고 떠났지만, 낯선 환경에서 소외감을 느꼈던 그를 보며 마찬가지로 타지에서 삶을 꾸린 입장에서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고향을 떠났다는 해방감만 만끽했던 나와 다르게 그는 폴란드의 처참한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며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거기에 병약한 몸 상태는 홀로 선 그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다. 파리에서 조르주 상드를 만나 함께 스페인으로 떠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노앙에서 생활하기까지 그의 진정한 친구는 오로지 피아노뿐이었다. 어지러운 정세 때문에 폴란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았던 그에게 피아노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몸이 약하다고 해서 정신까지 유약한 건 아니다. 만약 쇼팽이 마냥 나약한 사람이었다면 조르주 상드와의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덕적인 판단은 별개로 소문도 무성하고 자녀까지 있는 연상의 상대와 망설임 없이 사랑을 결심하는 태도에서 엄청난 용기가 느껴졌다. 용기 내서 선택한 게 아니라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한 것 같아 더욱 멋있어 보였다.

 

 

연주자 피오트르 쿠프카(3).JPG

 

 

작년 늦여름,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쇼팽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수려한 연주는 무더위가 막 가시기 시작한, 기분 좋게 적당히 서늘한 늦여름의 저녁을 황홀하게 장식했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특히 섬세하기로 유명한데, 직접 현장에서 들으니 서정적인 쇼팽의 음악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때의 그 여름날은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낭만적인 시간이었다.

 

산울림 편지 콘서트의 장점은 음악가의 생애를 시간순으로 다루면서 중간중간에 그 시기에 만들어진 음악을 연주한다는 점이다. 그 덕에 내가 좋아했던 클래식이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졌는지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들은 쇼팽이 늦여름의 낭만을 선사했다면, 산울림 소극장에서 들은 쇼팽은 겨울의 처연함을 품고 있었다.

 

 

 

사람에서 시작하는 예술


 

작년 산울림 편지콘서트 <슈베르트, 겨울여행>을 다루는 글에서 나는 클래식 작곡가를 탐구하는 과정을 철학자를 탐구하는 과정으로 비유했다.

   

 

그날 산울림 소극장에서 슈베르트라는 한 인물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서 클래식을 탐구하는 과정은 어쩌면 한 사람을 배우는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최근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이데거vs레비나스>라는 책을 읽은 경험까지 떠올랐다. 철학 역시 철학자의 생애부터 파악해야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든 학문의 시발점은 사람일 것이다. 음악과 철학은 물론 문학, 미술, 과학, 수학까지 사람에게서 탄생하지 않은 학문이 없다. 그동안 내가 클래식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당연히 인식해야 했을 사람의 존재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명곡도 그냥 탄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지금 즐기는 클래식 한 곡이 한 예술가가 온몸을 던져 참여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슈베르트가 일깨워줬다.

 

 

일 년 사이에 나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이전에는 그 학문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탕이 되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사람이 학문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최근 나는 나 자신에게 왜 철학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언젠가 같은 질문을 받게 될 때 최대한 있어 보이게 대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럴싸한 대답을 고르고 고르다 그리 있어 보이지 않은, 간단한 대답으로 끝맺었다. 나는 특정 철학 사상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철학자라는 존재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부조리한 이 세상에서 생각이 많으면 필연적으로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 생각에서 오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극적인 콘텐츠를 탐닉하면서 스스로 생각을 거세한다. 나 역시 머릿속으로 가득한 생각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내는 게 고통스럽다. 세상은 내게 생각 때문에 고통받을 것이냐, 생각을 지울 것이냐 둘 중 하나만 선택하기를 강요하지만, 나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생각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내게 철학자는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위인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나보다 훨씬 대담한 태도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그런 그들도 내 눈에는 나와 똑같이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인다. 넘치는 생각 때문에 괴롭지만, 그 생각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 괴로움에서 도망치기보다 정면으로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분석하고 자신만의 결론을 내리는 사람. 그렇게 해야 마음이 풀리는, 그런 평범한 사람으로 보인다.

 

<쇼팽, 블루노트> 공연을 보면서 쇼팽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천재적인 음악성은 전혀 평범하지 않지만, 하루하루가 그렇게 고통스러웠으면서도 그런 하루하루를 음악으로써 살아내려는 절박함에서 내가 사랑했던 철학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작위로 재생되는 클래식 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특히 좋은 음악을 들으면 작곡가를 찾아보는데, 열에 여덟은 쇼팽이었다. 그중에서도 녹턴 9번은 가장 듣기 편안해서 특히 즐겨 들었던 음악이었다. 나에게 쇼팽은 수많은 클래식 애호가가 마음에 품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산울림 편지 콘서트를 통해 쇼팽의 지난했던 음악 인생을 지켜본 끝에 들은 녹턴 9번은 그전에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마냥 감미롭기만 했던 그 음악이 전과 다르게 애절하고 절박하게, 마치 음악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의 마지막 유언처럼 들렸다.

 

이렇게 나는 그날 공연을 통해 위대한 음악가 쇼팽을, 아니, 살기 위해 음악에 헌신했던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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