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태의 첫 번째 소설집의 표제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이렇게 시작한다.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뒤의 문장들은 이백 년 전 프로이센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서울 동북부의 한 중학교의 두 학생의 이야기로 연결한다. 그렇게 우리는 진주와 니콜라이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진주와 니콜라이는 ‘너도 봉투 받는 애구나’라는 말로 이어진다. 그다음에는 각자가 일하는 직장이 끝나고 밥 먹는 사이가 된다. 그렇게 혁명가의 탄생이 서울에 사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시시함의 수상함
김기태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이루지 않는다. 성취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대체로 위기는 있으나 절정은 없다. 소설가 임솔아의 평처럼 김기태의 소설에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려고 신청서를 넣는 사람, 좋아하는 아이돌을 응원하려고 땀을 흘리며 형광봉을 흔드는 사람, 인터넷 쇼핑몰에서 낮은 가격순으로 물건을 검색하는 사람’이 나온다.
<전조등>은 이러한 인물상을 정면으로 보여준다. 군청 공무원인 아버지와 농협 창구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주인공은 성실히 공부하여 당시 유망하다는 평가를 받은 통계학과로 진학한다. 연극 동아리를 했고, 학점을 성실히 챙겨 재벌 그룹에 입사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에는 차를 샀고 오피스텔로 이사를 갔다. 몇 번의 소개팅과 연애를 하였고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재밌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 아내는 임신하였고 서른아홉이 되던 어느 밤 딸아이를 마주하게 된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더 큰 집을 구했고 남직원은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아이를 돌보았다. 새로 이사 간 첫날 그는 작고 예쁜 딸과 아내가 있는 사진 같은 풍경으로 들어가 옆에 앉는다.
이것은 단편의 평범함이다. 그러니까 평범은 평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평범함은 보편과 지향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는 있다. 태어나서 학교에 다니고 직장에서 일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게 된 한 남성의 이야기. 전혀 새롭거나 특별하지 않지만, 동화 같기도 하다. 주인공은 주인공다운 특색을 조금도 소설에서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매 순간 성실하게 살았을 뿐이다. 그랬던 주인공은 자신을 닮은 아이의 얼굴을 본다. 세상은 언제나 복잡하지만,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나는 단지 나로 살아가고
‘나’로 시작하는 문장의 전제는 누군가의 숨 쉬는 생애다.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른 채 살아있다. 그런데 ‘나로 살아가기’라는 말은 어딘가 숨 막힌다. 나는 그렇게 탐색과 선택의 대상으로 다시금 내 앞에 놓인다. 김기태의 소설에는 단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롤링 선더 사랑>에는 연애 프로그램에 참여한 직장인이, <보편 교양>에서는 방과후 프로그램에서 고전 읽기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가, <팍스 아토미카>에서는 강박증과 불안증으로 추정되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인물의 세계가 등장한다.
<팍스 아토미카>에서 화자는 이런 의문을 던진다. 대다수가 경증 혹은 중증의 정신질환을 경험하고 이것을 의약적으로 조절하는 데에 있어 큰 거부감이 없는 현대에, 내가 감각하는 나의 정신질환은 유의미한가. 이렇듯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세상과 관계 맺고 살아간다. 여기에서 세계는 공간의 개념일 뿐 아니라 시간의 개념이 된다. 개인은 단지 살아간다. 무언가를 시도해 본다. 그 시도와 살아감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 위에 놓이게 된다. 나의 살아감은 세계에 영향 미치는 바 없으나, 나는 역사 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나의 살아감은 또다시 내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다. 나는 책임은 있지만 의무는 없고, 원인은 있지만 결과는 없이 단지 살아갈 뿐이다.
이것은 절망이 되는가. <무겁고 높은>의 배경은 강원도의 작은 소도시다. 그곳은 이제 폐광촌이 되었고, 가장 유망한 일자리는 동네의 카지노가 되었다. 아버지는 광부였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송희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 역도부에 있지만 직업인이 될 정도로 무게를 들지 못한다. 그러니까 유망하지 못하다. 송희가 역도를 하는 이유는 들 수 있기 때문이 아닌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송희는 경기에서 목표 중량 100kg을 들지 못하고도 연습실에 계속 나간다. 그때 송희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이건 영광이 아니야. 이건 미래도 아니고 꿈도 희망도 아니야. (...) 어떤 비유도 아니고 상징도 아닌, 말하자면 그냥 100킬로그램의 손때묻은 쇳덩이.”
송희는 그저 들 수 있을 만큼 들 뿐이고 들고나서는 바로 버린다. 송희의 이야기로 송희의 아버지를 이해한다. 송희가 나고 자란 마을을 이해한다. 그렇게 많은 걸 이해해 본다. 내가 딱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은 단지 무력감인가. 그런데 나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 같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은 인터내셔널이오!
다시 돌아와,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나는 인터내셔널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끔은 설레고 가끔은 무기력하다.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어가 요구하는 보편성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한참이나 멀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도저히 근대의 국가 간 체계에서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참이나 멀기 때문에 인터내셔널은 진주와 니콜라이가 쓰는 것처럼 단지 밈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밈이 될 때의 마음은 편안하고 우습다. 그래도 이건 손에 잡히기 때문이다.
<보편 교양>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고등학생 때, 은재의 방식으로 교사들을 난처하게 만들던 학생이었다. 마르크스를 계승한 학자들은 학교를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재생산하는 공간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중학생 때, 누군가가 나에게 공교육의 가장 큰 목표는 하루에 8시간을 앉아 있을 수 있는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을 때 받은 충격도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배운 동시를 기억한다. 어린 우리에게 동시에 나오는 개나리를 직접 보여주고 싶어 학교 화단으로 나갔던 선생님의 미소를 기억한다. 물론 그 담임 선생님은 어린 우리를 때리기도 했지만 말이다(학생인권조례 재정 이전 시기).
나는 학교에서 종종 맞았지만, 폭력과 체벌에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고, 자본주의 재생산 기구라는 학교에서는 처음으로 공산당 선언을 빌려 읽었다. 수능을 고깝게 생각한 부적응자였지만 대학에 와서는 사교육으로 적지 않은 돈벌이를 했다. 그리고 학생부종합전형을 위해 개설된 <고전 읽기> 프로그램에서 자본론을 열심히 읽은 은재가 대학에 가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은재 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보편성이 의심받고 규범은 혼란한 시대이다. 그럴만한 때이기도, 무언가가 필요한 거 같기도 한 때이다. 그러니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은 인터내셔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