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일이 밉지 않아 - 아침이 오면 공허해진다

글 입력 2024.05.1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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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침이 오면 공허해진다'(2024)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행복이란 뭘까. 아마 태초의 인류부터 고민했을 문제. 그렇게 쌓여 온 숱한 답들 중 내가 생각하는 행복에 가장 가까운 답변이 하나 있다. 그러니까,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상태라고 하던가? 아마 방송인 홍진경의 말로 기억한다. 개념과 논리로 철저하게 논증된 정의보다 이렇게 경험에서 우러나온 직관이 더 크게 와닿는 순간이 종종 있다.

 

그래서 스스로 우울의 척도를 가늠할 때면 나는 가장 먼저 경구 하나를 떠올리고 그에 대한 내 감상이 어떠한가를 들여다본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이 말이 일상의 지속성에 대한 다소 중립적인 설명 혹은 희망적인 메세지로까지 읽히면 상태가 괜찮은 것이고, 더없이 재수없게 들리면 아직 잠에 들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계속되는 내일이 때로는 무한에 가깝게 주어지는 기회 같기도, 때로는 그저 무의미한 고통의 예정 같기도 하다.

 

걱정거리 없이 누울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다음 날 아침이 두렵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별거 아닌 조건 같은데 이런 평온함에 이르는 일이 그다지도 어렵다. 밤만 되면 오늘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이 떠오르고, 그렇게 밀려 있는 과업 위로 새롭게 쌓아올려질 내일의 일이 생각난다. 그런 내일들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은 모여 또 일 년이 되고 평생이 되고. 내 생활이 시시프스의 그것 이상이 되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일 때 맞는 아침 햇살이란 어떠한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는 것이다.

 

매일 일찍 일어나서 몸을 씻고 단정히 옷을 챙겨 입는 일도 힘겹고, 겨우 나가서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있다 보면 절로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진다. 마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고. 넋두리하고 싶어도 이 모든 굴곡은 너무나 평범해서, 남들처럼 무던하지 못한 스스로에 화만 날 뿐이다. 세상 만사에 마음의 심지가 휘청거린다. 휘둘리고 있다... 그걸 자각하면 나의 내일이 내 손 안에 있지 않다는 공허함이 밀려온다. 때로는 눈에 띄게 뾰족하고 무거운 것들보다 한없이 비어있음이 나를 와르르 무너뜨린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경험이다.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도 모두가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을 그런 나날들. 영화 '아침이 오면 공허해진다'는 그렇게 텅 빈 마음을 과장도 없이 정확하게 스크린에 옮겨낸다. 누가 봐도 혀를 차게 되는 드라마틱한 비극도 아니고,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화려한 기쁨도 아닌, 가장 보통의 불행과 가장 보통의 행복. 사소함에 무너지고 사소함에 힘을 얻는, 연약하고도 강인한 우리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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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 없는 회복: 아침이 오면 공허해진다


  

 

말수 적고 낯가리는 내향형 인간 '이이즈카'(카라타 에리카). 취업 후 적응하지 못해 회사를 그만두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 지내고 있지만 가족들은 그런 그녀의 상황을 모른다. 아침에 눈뜰 때마다 공허한 감정을 느끼던 어느 날,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던 '오오토모'(이모우 하루카)와 우연히 재회하게 되는 '이이즈카'. 오랜만에 만나는 동창이 어색하다가도 점차 두 사람은 다시 그때 그 여중생 시절처럼 즐거운 시간을 쌓아 가는데...

 

 

처음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엔 크게 흥미를 유발할 만한 소재가 눈에 띄지는 않았다. 실제로 영화 자체도 기승전결이 뚜렷하다기보단 누군가의 일상을 그대로 옮겨온 느낌의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이 지나칠 정도의 현실감에 있었다.

 

얼핏 보면 흔히 떠올리는 '잔잔한 일본 힐링 영화'의 전형 같지만, 생략과 함축을 통해 어딘가 심오함을 담아내려는 독립영화풍도 아니고, 무책임한 희망만을 던져놓는 텅 빈 위로를 위한 기능적 이야기도 아니었다. 영화는 모든 부분이 잘 직조되어 매끄러운 서사로 관객들에게 개연성을 납득시키는 구조라기보다는, 드문드문한 현실의 고저를 충실하게 묘사하는 형태였다. 멋진 결말을 위해선 절삭되었어야 할 군더더기까지도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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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술자리 분위기 고증만큼은 거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여느 드라마에서처럼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시고 한순간에 고뇌를 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조곤조곤 사는 이야기를 곁들이다가 조금씩 분위기가 묵직해져서 아주 잠깐 진심을 참을 수 없게 되는 정도의 취기. 왜 전 직장을 그만두었냐는 편의점 동료의 물음에 피상적인 대답 정도를 내어놓던 이이즈카는, 오오토모의 집에서 캔하이볼을 홀짝이면서 하루하루 영혼이 마모되는 것 같던 직장 생활에 대한 심경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리얼한 장면을 보고 있자니 내 취중진담의 기억들이 떠올라 순간 괴로울 정도였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좀 나아질 거라고 하지만 마음이 텅 비게 되면 내 상황을 일일이 설명할 힘도 없어진다. 삶이 버거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고, 나에게 배당된 고통은 남이 짊어져줄 수도 없는 것이라 털어놓고 이해받는 일마저 피곤스럽다. 그래서 평소라면 속에 담아두거나 짧은 한마디 정도로 일축했을 이야기, 너무 평범하고 흔해 빠진 고민이라 새삼스럽게 늘어놓고 싶지도 않던 사연의 매듭을 나도 모르게 풀어 버리게 되던 순간들. 바로 그 때, 참아왔던 눈물이 뜻밖의 인물 앞에서 터지면서 내가 왜 이러지, 하고 멋쩍은 웃음을 짓게 되지 않던가.

 

외로운 상태에서 간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 이 애매한 인연. 적당히 친하고 적당히 나의 내막을 알지 못하는 이이기 때문에 함께하는 시간이 산뜻하게 즐거울 수 있고, 또 그래서 처음으로 솔직해질 수 있다는 미묘한 사실. 이 영화에서만큼의 리얼한 묘사가 아니면 차마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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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쌓인 무기력을 지나치게 절대적인 것 혹은 한순간에 마법처럼 떼어낼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은 점도 인상적이었다. 사실 마음이 텅 비는 방식은 통념처럼 그리 극적이지도 않다. 우울과 무력감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부터 존재를 잠식한다. 망가진 커튼 레일 하나를 고칠 기운이 나지 않고, 잔잔히 흘러가는 물을 보면 문득 모든 것이 무상해지고, 건강을 망칠 걸 알면서도 부모님이 보내준 음식 재료를 방치한 채 컵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식이다.

 

구질구질한 방식으로 생활 곳곳에 들러붙은 무력감. 이 모든 것이 단번에 없어지지는 않지만, 가끔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인연 하나가 이를 잠시 떨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다. 그 얇디 얇은 발판이 무어라도 딛을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이즈카는 그것을 딛고 다시 조금씩 활력을 채워본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동료를 위해 조금 무모한 행동을 벌이거나, 고장난 커튼 레일을 고치거나, 뭐라도 해먹어보려고 레시피를 검색해서 인덕션 앞에 서거나.

 

만약 후반부의 이이즈카가 멋지게 고기 감자 볶음을 만들어내고, 옷장에 처박아 둔 정장을 꺼내입고 다시 회사로 복귀하는 결말이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그저 그런 작품으로 기억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간만에 요리를 결심한 이이즈카는 간장이 똑 떨어져 결국 레토르트 카레를 먹기도 하고, 이렇다 할 진취적인 계획을 결심하는 모습 같은 것은 결말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억지로 희망적인 마무리를 지어서 아직 그런 단계까지 닿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급함을 심어주지 않는다는 점이. 영화의 담백함은 메세지를 전달하는 톤에서까지 묻어나는 것이었다.

 

한순간에 삶이 말끔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당장 내일의 해가 절망스럽지는 않은 것. 일단은 솔직해질 수 있는 힘을 되찾고, 나를 돌보겠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겨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 이이즈카의 이야기가 말하는 회복은 딱 그 정도의 소박함이었다. 이 생활은 어딘가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결말을 향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자체로 괜찮은 삶의 흐름이라고, 내일을 미워하지 않고 살아내는 우리는 참 기특하다고, 영화는 산뜻하게 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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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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