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사람이 있을까? 다른 이의 도전을 보면 박수를 보낸다. 손뼉을 치지 못해도 고개를 끄덕이면 끄덕였지, 손사래를 치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일은 없다. 종종 도전에 부정적 태도를 비치는 듯한 사례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 도전의 방향을 향한 비판이지, 도전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누구나 도전을 좋아한다. 도전은 단 두 음절로도 굳은 의지와 긍정적 힘을 연상케 하는 단어다. 그러나 이 단어를 구성하는 한자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돋울 도(挑)’에 ‘싸움 전(戰)’을 쓰는 도전의 첫 번째 사전적 정의는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이다. 물론 두 번째 정의로 ‘어려운 사업이나 기록 경신 따위에 맞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가만히있는 상대에게 싸움을 먼저 건다는 의미는 같다.
“네가 먼저 시작했어.” 문제의 책임을 상대에게로 떠넘기는 가장 기본적이고 쉬운 이 문장은 누구에나 익숙할 테다. 우리는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을 골칫덩이 취급한다. 그런데도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거는’, 그러니까 도전하는 사람은 응원한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기,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거는 사람이 있다. 바로 “명명백백한 대법원의 수치”이자 “사악한” 마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다.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이하 원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RBG, 2019)
소수자의 자리에서 목소리를 냈던 긴즈버그는 자연스레 여성의 변호를 많이 맡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양육비 지원을 받지 못하던 편부를 위해 싸운 적이 있었고 이는 다큐멘터리에서도 꽤 자세히 나온다. 이 부분의 시각 자료 중 하나로 당시의 신문 기사가 주어진다.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제목 ‘Widower wins social security(보육 수당을 얻어 낸 홀아버지)’, 그중에서도 ‘Widower라는 단어가 괜히 눈에 들어온다.
홀아비를 뜻하는 영어단어 ‘widower’는 과부를 뜻하는 영어단어 ‘widow’에 ‘-er’가 붙어 만들어진 단어다. 사람의 특성이나 직업을 표현하는 많은 단어가 남성형을 기본으로 하고 그에 다른 접사를 붙여 여성형으로 만드는데, 이 단어는 그 반대로 여성형이 기본이다. 과부라는 단어를 홀아비라는 단어보다 사용할 일이 많다는 뜻일 텐데, 그에도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생물학적으로 또는 사회적 요인으로 남성의 수명이 더 짧다. 과거에는 남성의 재혼율이 높고, 여성이 연상의 남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도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실제로 과부의 수가 홀아비의 수보다 많은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개인의 혼인 상태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중요한 요소이기에 과부라는 단어가 훨씬 더 많이 사용되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람의 직업이나 특성을 표현할 때 남성형이 기본인 게 흔한 세상에서 반대 사례가 하나 보이는데 그 뜻이 하필 과부인 게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여성형이 기본인 단어가 이것 하나뿐인 건 아니다. ‘widow/er’도 남성형이 기본이길 바란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저 단어를 보면서 왠지 팔짱을 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여성’ 대법관
내가 사소한 데서 시비를 걸고 있는 걸까? 그러나 사소한 언어의 차이가 얼마나 큰 인식의 차이를 낳는가.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긴즈버그를 처음 소개할 때 대법관이라고 적을지, ‘여성’ 대법관이라고 적을지 수없이 고민했다. 아무 수식어 없이 바로 대법관이라고 했을 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남성’ 대법관을 먼저 떠올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독자를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조차 그럴 자신이 없다). 글에 포함된 이미지로 여성임을 볼 수 있겠지만, 그 사실을 보기에 앞서 떠올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긴즈버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단 한 순간도 의심받지 않도록 모두에게 외치고 싶으면서도, 사람들이 그 외침을 향해 고개를 돌리길 원하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나 끄덕이는, 아니면 그 정도 반응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외침이길 바랐다. 그러나 글만으로 그것을 표현하기에 내 필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나는 여성이라는 단어를 생략하기로 했지만 지금 이 문단을 씀으로써 긴즈버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형광펜을 몇 번이고 그어대는 중이다.
‘비’동의
이왕 그은 형광펜, 다른 단어에도 또 문질러야겠다. 단어의 기본형과 변형을 생각하다 보면 국내판 부제가 눈에 들어온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의 약자인 ‘RBG’를 그대로 사용해 간결하게 지은 원제와 달리, 국내판의 제목은 조금 더 길다. 거대한 몸집이 보인다고 느껴질 정도로 권위적인 대법원의 판결에 수없이 반대 의견을 내비친 긴즈버그가 수없이 말한 문장, ‘나는 반대한다(I disagree)’는 국내판의 부제가 되었다.
자연스러운 번역을 위해 ‘disagree’가 ‘반대한다’로 옮겨졌지만, ‘agree’와 ‘disagree’를 함께 놓고 단어의 구성을 뜯어보자면 반대한다가 아니라 ‘비동의한다’가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사실 비동의라는 단어는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없는 단어지만, 긴즈버그는 그저 반대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가운데 혼자 ‘비’동의하는, 그런 반대를 말한다. 다수 속의 소수는 항상 거슬린다. 남성 속의 여성이 그렇고, 편모 속의 편부도 그렇다. 동의 속의 비동의. 긴즈버그는 비동의한다.

우리는 비동의한다
혹자는 다큐멘터리
긴즈버그는 법원이나 뉴스뿐만 아니라 SNL에서, 밈에서, 심지어는 사람들의 티셔츠에서도 보인다. 엄숙하고 진중해야 할 것만 같은 대법관이 이렇게 소비되어도 괜찮은지 의문스럽기도 하지만 긴즈버그는 이미 그런 사람이고,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단조롭고 지루하리라는 편견과는 달리,
다큐멘터리를 보면 알겠지만, 사실 긴즈버그는 재밌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대법관이나 다큐멘터리가 갖는 이미지만큼이나 지루한 사람에 가깝다. 그런 그를 재밌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그를 밈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 그를 아끼고 그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다. 이 지지가 법정 안팎에서 긴즈버그의 영향력을 키운다.
우리가 도전하는 사람을 응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거는’ 대상은 다들 남몰래 공감하는 문제다. 법정 안에서 비동의를 외치는 것은 긴즈버그 혼자일지라도, 사회 전체에서 비동의하는 것은 그 혼자가 아니다. 긴즈버그가 법정 안에서 거슬리는 소리를 내고, 우리가 다 함께 거스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긴즈버그를 응원하고, 그래서 긴즈버그는 싸움을 거는 골칫덩이가 아니라 도전을 하는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 우리는 비동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