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법륜 스님의 말 -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도서]
-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는 청년들이 겪는 여러 불안에 대한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담은 책이다. 법륜 스님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고민들에 대해 마음 수행을 중심으로 답을 한다. 책의 본문 구성은 상황별 주제에 따라 4가지-①환상 속의 나, ②관점 바꾸기, ③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것, ④선택과 책임 사이에서 찾은 행복-이지만 아래에서는‘자신’, ‘타인’,‘세계’라는 관계의 구획을 기준으로 분류하여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후에는 책의 제언의 의의와 한계를 서술한다.
‘자신’은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스스로에게 느끼는 만족감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것은 아니다. 자존감이 낮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타인을 보고 우월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상상의 나’인 가아(假我)를 버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자신의 괜찮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나는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는 나이기도 하다. 물론 살다 보면 개인은 여러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에 대해 법륜 스님은 그 감정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저 지켜보라고 말다. 외롭다면 외로움을, 슬프다면 슬픔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휩싸이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 감정들은 자체로서 문제 될 것은 없다. 이 과정은 수행이 된다. 수행은 참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원리를 알고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이다.
타인에 대한 기본 태도는 원망 없음과 감사함이다. ‘산이 아름답다’라고 할 때 이익을 보는 것은 산이 아닌 자신이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원망하면 힘든 것은 본인이다. 또한 감사함을 가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도 본인이다. 이를 위해서는 타인과 내가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불교 용어로 ‘분별심을 없앤다’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분별심이 없다는 것은 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르더라도 타인이 틀린 것이 아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린다는 의미이다. 이 능력은 여기에서도 자신에게 했던 것과 같은 관망의 태도가 필요하다. 설사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도 화가 안 일어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갈등이 일어날 일도 없어진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간다. 따라서 타인은 나를 괴롭힐 수 없고 나 역시 타인을 괴롭힐 수 없다. 타인 때문에 어떠한 증상이 터져 나왔다면 그것 역시 타인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내재된 요소였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건강한 자기인식과 안정적인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우리는 모두 괜찮은 존재가 된다. 풀꽃처럼 특별할 것 없음과 자신이 괜찮은 사람임을 동시에 깨닫는 것은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제안하고자 하는 바이다. 나와 타인에 대한 건강한 이해는 마침내 세계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된다. 여기에서 세계는 지구를 모두 포함할 정도로 넓은 동시에, 현재라는 시간의 영역이다. 원망하지 않는 마음은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감각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에 보다 집중해야만 변화를 포착할 수 있고 그 변화를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고 올 수 있다. 이처럼 다시 세계를 현재로 받아들이는 것은 나에게 ‘조고각하(照顧脚下)’, ‘너의 발밑을 보라’는 말로 돌아온다. 10년 뒤에 자신이 꿈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당장 움직여야 한다. 생각만으로는 힘이 없다. 현재를 바꿔야 한다.
지금, 여기, 나
시대의 천재들은 작은 동네에서 나고 자란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작은 동네일수록 사람이 적기 때문에 성공의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어 자존감이 높아지고 그것이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천재를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예시가 이 책에서 지향하는 바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으나 성공의 경험이 만드는 자존감이라는 측면에서 같이 이야기해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재 2030들은 전세계로 연결된 경쟁을 나노 단위로 수행한/하고 있는 세대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부터 취직까지 내가 얼마나 못났는지,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잘 사는지 끊임없이 비교할 수 있는 구조이다. 이는 단순히 가능할 뿐 아니라 생존을 위해 일정 부분 강제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 인식이 건강하게 형성되기 어려울 수 있다. 현대의 자아 인식은 빈곤함과 비대함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 부분이 이 책에서도 간접적으로 설명이 되어있다. 시장의 기준에서 타인과의 비교에 근거한 자아는 근본적으로 빈곤하고, 동시에 자신의 특별함은 타인보다 낫다는 자만심에 근거하기 때문에 경향적으로 비대해진다.
이런 현실에서 풀꽃처럼 특별할 것 없음과 자신이 괜찮은 사람임을 동시에 깨달음으로써 주체성의 회복을 꾀해야 한다는 제언은 일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나 점차 심각하게 왜곡되어가는 자아 인식에 대해 유의미한 비판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는 동시에 현재에 더 충실할 수 있게 하여 풍요로운 삶을 만드는 시작이기도 하다.
나는 옳고 당신은 틀린 것일 수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이 책의 전체 주제를 관통한다. 맞는 말이다. 개인에 초점을 맞췄을 때 제공 가능한 해결책이 있다.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거나 적절한 약물을 복용하는 것. 또한 법륜 스님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듯 마음 수행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늘날 유행처럼 퍼지는 힐링, 데일리 루틴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개인적 해결책의 제시가 가지는 장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를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영역으로 만들고 즉각적인 변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때 생길 수 있는 공백이 있다. 다수가 정신 질환을 경험하게 되는 구조적 조건은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청년들이 대표적으로 우울을 경험하게 되는 취업 준비 과정의 경우, 현재 노동시장 구조가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정신과를 방문하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해결될 수가 없다.
이 책에서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의 경우에서 문제를 느꼈다. 하나는 가정폭력에 대한 법륜 스님의 입장이다. 첫 번째 사례는 10대 때 엄마로부터 겪은 폭언, 폭력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54쪽).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는 무능력했고 가정폭력을 저지른 아빠 때문에 남자를 만나는 것이 두렵다는 사연이었다(116쪽). 물론 법륜 스님은 앞으로 부모와 다시는 만나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우회로 역시 언급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모에게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즉문즉설의 요지였다. 첫 번째 사례는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음에도 의식주를 제공했고 자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두 번째 사례는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음에도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이 때문이므로 결국 그 자체가 부모의 사랑을 더 받았다는 증거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가정폭력은 아동·청소년 시기 당사자들에게 지대한 상처를 남긴다. 양육의 과정이란 단순히 의식주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것마저 제공하지 않으며 방임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의식주가 제공되었다는 것이 적절한 양육에 대한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아동은 폭력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무력감을 경험하게 된다. 최근 미디어에서 ‘엄마/아빠도 엄마/아빠가 처음이라 그래.’라는 말이 흔히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처음 해보는 부모 역할에 부모 역시 실수가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실수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아동이 경험한 상처와 트라우마에 대한 정당화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지속적인 폭력의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가정폭력 당사자에게 ‘그래도 부모님은 널 사랑하신 거다. 감사해야 한다.’라는 말은 오히려 아동기 경험을 제대로 남기는 것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 6살이 경험한 것은 6살의 눈에서 판단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도 있다.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고 이후의 내 삶이 그 경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법륜 스님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하여 자기 안의 원망 때문에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자 함도 컸겠지만 이로 인해 부모에 대한 죄책감마저 안고 가야 할 수 있음이 염려되었다.
문제를 느낀 다른 하나의 경우는 사회 문제에 대한 입장이었다. 첫 번째 사례는 불평등에 대한 물음이었고 두 번째 사례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분의 답답함이었다. 첫 번째 경우 법륜 스님은 한국에 국한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볼 것을 촉구했다. 즉, 당장의 생계나 최소 수준의 교육마저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더욱 집중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 답변은 동문서답에 가까워 당황스러웠다. 물론 사회문제를 봄에 있어서 국제적인 시야를 갖추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또한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도 분류할 수 있을 한국에 사는 국민이라는 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 국가체계에서 사실상 법륜스님이 말한 생존과 교육과 같은 기본권의 보장은 오직 국민국가를 통해서만 성취가능하다. 봉사나 기부와 같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나 몇 명의 사례가 생기는 것이 해당 국가의 근본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님을 생각해야 한다. 즉, 한국에 사는 시민이 한국의 사회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개입할 여지를 고민하는 것을 특정 국가에 매몰된 시각을 가지는 것이라 평가할 수 없다. 해외의 더 못사는 사람을 생각하라는 이 답변은 질문을 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지 실제로 한국이나 해외 모두에 변화를 만들 수 있는 방향은 아니다.
두 번째 사례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분별심을 갖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분별심을 내지 말라’는 말은 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틀렸다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열심히 주장하되, 타인을 미워하거나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말라는 것이며 행복하라는 뜻이다. 또한 옳다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이익은 감수해야 함도 말했다. 사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많이 공감할 수 있던 대목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파괴하고자 하는 노여움으로는 무엇이든 오래 지속할 수는 없는 것이고 당장 내일 세상이 바뀔 것은 아니니 그 과정에서 내가 평정심을 가지고 끝까지 버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비정규직과 정규직과 사용자의 목소리의 크기가 같지 않음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법륜 스님이 강조하는 현재이다. 비정규직은 산업재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생활임금을 쟁취하기 위해, 무급 노동시간을 없애기 위해, 관리자의 폭언 및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기 위해 입을 열지만, 사용자는 자신의 수익률을 위해 입을 연다(영세 자영업자의 경우는 우선 제외하고 생각해보자). 사용자는 노동자를 해고하면 되지만 노동자는 해고되면 당장 생계에 곤란이 생긴다. 이런 불균등한 세계에서 너도 틀리지 않고, 나도 틀리지 않다라는 말이 유효하기는 어려울 거 같다.
정신승리와 정신관리 사이에서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정신승리는 ‘경기나 경합에서 겨루어 패배하였으나 자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은 지지 않았다고 정당화하는 것을 이르는 것’을 뜻한다. 실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음에도 의지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이 용어는 경기나 경합 외의 상황에서도 빈번히 사용된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선언은 실제로 전혀 괜찮을 수 없는 조건들 위에 서 있는 대부분의 청년들에게 정신승리 정도로 취급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일 당장 세상이 괜찮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높은 확률로 괜찮지 않은 사회에서 나는 내일도, 모레도, 내년에도 살아야 한다. 정신승리만을 용인하는 이 사회를 조금씩이라도 바꾸기 위해서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왜곡되지 않을, 긍정적 자기인식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승리와 정신관리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을 타며, 답은 언제나 그 중간에 있음을 믿는다.
[진세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