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 여성들은 그저 써 내려갈 뿐이다 - 뮤지컬 브론테

글 입력 2024.04.1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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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오랫동안 글쓰기에 대해 고민했다. 언젠가부터 내 삶은 글과 분리될 수 없었고, 힘든 순간에 나를 구원해 주는 것도 언제나 글이었다. 나는 글이 별다른 재주가 없는 내가 당당하게 나의 생각을 밝힐 수 있는 도구라서 좋다. 소심하고, 유약하고, 부정적인 나의 성격을 극복해야 하는 단점이 아니라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승화할 수 있는 도구라서 좋다.

 

최근 독서 모임을 통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학대와 멸시를 받은 고아 ‘히스클리프’가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냈던 워더링 하이츠에 돌아와 복수하는 내용이다. 유명한 고전이라는 정보만 알고 읽기 시작한 <폭풍의 언덕>은 예상을 넘는 음산한 기운과 휘몰아치는 전개에 제법 분량이 긴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술술 읽혔다. 책을 다 읽고 이 긴 분량에도 늘어지지 않고 워더링 하이츠에서 벌어지는 파멸의 이야기에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고 생각됐다.

 

그러나 소설이 재밌다고 해서 읽는 과정이 마냥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함께 읽은 모임 구성원들과 비교해 유독 주인공 ‘히스클리프’를 향한 강한 적개심을 느꼈다. 필요 이상의 복수를 하는 그가, 큰 잘못이 없는 사람들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망가트리려는 그가 마냥 악랄하게만 느껴졌다. 나에게 히스클리프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자체로 폭풍 같은 자연재해로 나타나서 힘없는 사람들을 무력하게 괴롭히는 사람이었다.

 

읽는 사람도 이렇게 괴로운데 이 장대한 비극을 완성한 에밀리 브론테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뮤지컬 <브론테>는 세계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자매,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앤 브론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뮤지컬을 통해 책 바깥에서 처음 만난 에밀리 브론테는, 그녀의 자매들은 생각보다 나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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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브론테>는 거대한 사건보다는 ‘글’에 대한 세 자매의 대화에 초점을 맞춰 진행된다. 극은 샬럿 브론테가 함께 글을 쓰고 출판하자며 에밀리를 북돋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많은 사람에게 글을 보여주고픈 샬럿과 준비되지 않은 글을 내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에밀리의 의견은 쉽게 모이지 않는다. 막내 앤은 자매 모두가 글을 사랑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언니들의 갈등을 중재한다.

 

글을 사랑하는 건 같지만, 글에 대한 태도는 다르다. 샬럿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잘 읽히는 글을 쓰고 싶어 하고, 에밀리는 내면의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글을 쓰려 한다. 앤은 언니들 못지않게 글을 사랑하지만,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몰라 방황한다.

 

글에 대한 그들의 상반된 태도는 당시 시대상과도 관련이 있다. 여성이 글을 쓰는 게 허락되지 않던 시절, 책을 출간하려면 남성 이름의 필명을 써야 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누구나 에밀리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세상에 던지기 위해 글을 쓰려 하지만,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마냥 내면이 시키는 대로 글을 쓸 수는 없다. 샬럿은 이를 잘 알고,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만 쓰려는 에밀리에게 자주 화를 낸다.

 

뮤지컬을 보던 시점에 나는 나의 진로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글을 좋아하고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도 이제는 잘 알겠는데, 내가 원하는 글만 써서는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하던 때였다. 나에게 대단한 신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사회가 원하는 대로 방향을 바꿀 의향은 있었다. 그러나 키보드에 올린 나의 손가락은 그러지 않았다. 남이 주입한 대로 쓰려고 하면 꼭 나의 손가락은 얼어붙은 것처럼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겨우 무언가를 써 내려가도 도무지 글이라곤 할 순 없는 부끄러운 낙서만이 나올 뿐이었다.

 

<브론테>의 넘버 중에 ‘써 내려가’라는 말이 반복되는 넘버가 있다. 그렇다. 그냥 써 내려갈 뿐이다. 되든 안 되든 일단 써 내려가 보고 그 글이 어떤지는 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글에 대한 고민에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브론테>를 보고 나는 아주 단순하고 당연한 진리를 깨달았다. 나는, 우리는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일단 써 보고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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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를 보기 전에 <폭풍의 언덕>을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소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지, 그 음산함과 기괴함이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는 지금에도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알고 있기에 뮤지컬에서 자신의 글을 붙잡는 에밀리를 더욱 응원하고 싶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제인 에어>를 미리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폭풍의 언덕>과 달리 <제인 에어>는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으며 승승장구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샬럿은 그토록 바라던 작가로서의 성공을 이뤘음에도 오히려 힘든 형편에서 함께 글을 썼을 때보다 더욱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다. 만약 내가 <제인 에어>를 읽었다면 자매 중에서 현실적인 부분을 책임졌던 샬럿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글을 썼는지 와닿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나는 수시로 내가 왜 글을 쓰고 싶어 하는지, 어떤 글을 쓰려고 하는지,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내 글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었다. 어쩌면 이 질문은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나온 질문일지도 모른다. 이 사회에서 여성은 무엇을 하든 자기검열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데, 그건 19세기를 살았던 저들도, 21세기를 사는 나도 다르지 않다.

 

오래전 여성이 쓴 로맨스 소설은 지금처럼 그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교양 없는 대중들이 즐기는 하찮은 오락거리에 불과했다. 지금도 여성의 예술은 불필요한 해명이 요구된다. 작은 흠결에도 거대한 비판이 따라오고, 충분히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치를 깎아내리는 이들에 맞서야 한다.

 

나는 직접 겪은 경험을 글로 풀어내면서도 ‘이 내용을 써도 되나?’ ‘너무 솔직해서 사람들이 싫어하면 어쩌지?’라는 고민을 자주 한다.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으면 솔직함은 나만의 장점이니 검열은 내려놓고 편하게 쓰라는 조언을 듣지만, 그게 쉽지 않다.

 

뮤지컬을 보고 결국 나의 고민은 험난한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명시적으로 여성으로서 글을 쓸 수 없던 시대에서도 브론테 자매는 끊임없이 써 내려갔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장애물을 만들고 내가 만든 허구의 장애물에 겁먹고 망설이고 있었다. 어차피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으면서 말이다.

 

최근 원치 않은 일에 지나칠 정도로 에너지를 많이 빼앗겨서 정작 삶의 소중한 가치는 내팽개치는 나날을 보냈다. 짧은 시간에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진 나는 뮤지컬 <브론테>를 보고 작게나마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내가 아는 나의 모든 면모가 세 자매 모두에게 있었다. 나는 샬럿처럼 내 글일 어떻게 하면 잘 읽힐까 고민하기도 하고, 앤처럼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몰라 방황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에밀리처럼 주변 상황에 잘 흔들리고 연약한 정신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하고 끝내 써야만 하는 사람이다.

   

<브론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세 자매를 칭송하거나 평가하는 극이 아니다. 그저 글을 너무나 사랑했던 세 자매를, 함께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읽어주면서 격려를 주고받았던 세 자매를 보여줄 뿐이다. 바보처럼 글밖에 모르는 저 여성들을 통해 21세기의 나는 기어코 수천 번 세우고 수천 번 무너졌던 그 다짐을 다시 떠올린다. 역시 나는 글을 써야겠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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