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기변환]ri_ya-burning-candles-6768469_192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5/20260507020210_fbvnuwqr.jpg)
1. 인상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가스통 바슐라르라는 철학자는 개념보다 모호한 인상이 먼저 전달되는 이름이다. 자연현상을 심리적 원형으로 사유하는 철학자, 물질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 내면을 탐구하는 사상가. 내게도 모호한 원초적 원소들의 이미지와 엮인 이름으로 기억된다.
『촛불』을 읽은 지금도 그 인상이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인용된 문장으로만 그를 알았을 때와, 이 책을 읽은 후에 그를 알았을 때가 다르다. 바슐라르의 문장이 몽환적이어서 정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끝내 이미지를 개념으로 고정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촛불을 설명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그는 이 책에서 사유가 어떻게 이미지 위에서 잡히지 않고 미끄러지고, 그 이미지가 어떻게 다른 이미지로 번져가는지를 집요하게 실험한다.
그러니 『촛불』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쉬이 ‘읽히는’ 책이 아니다. 논증도, 단계도, 조작적 정의도 없다. 오직 하나의 태도만 책에서 계속 반복된다. 이미지 안에 머무르는 사유. 그것은 어떤 언어적 체계에도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일종의 고집.
2. 촛불
이 책에서 촛불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물질 세계를 인식하는 조건이고, 사유가 취할 수 있는 태도의 형상이다.
불은 보통 격렬하고 파괴적인 힘으로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바슐라르가 고른 것은 화염이 아니라 촛불이다. 심지를 따라 천천히 타오르고, 수직으로 조용히 서 있는 불꽃. 그 느리고 지속적인 움직임은 렘브란트의 인물들을 연상시킨다. 세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으로 가라앉는 빛. 상승하지만 결과적으로 침잠하는 것.
결정적인 것은 이 빛의 성질이다. 폭력적으로 모든 것을 폭로하는 빛과는 다르다. 촛불은 밝지만 충분히 밝지 않다. 사물을 또렷하게 드러내지 않고, 주변을 여전히 어둠 속에 남겨둔다.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사물의 윤곽도 함께 흔들린다. 그러면 세계는 더 이상 분명히 파악되는 대상이 아니라, 흐릿하게 남겨진 가능성의 장이 된다.
바슐라르의 '몽상'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그에게 몽상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대상을 지배하거나 체계화하려는 충동을 잠시 내려놓는 상태다. 몽상가는 세계를 분석하지 않는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미지가 스스로 변형되도록 내버려둔다.
책의 후반부에 편집되어 부착된 자료를 통해, 융의 구분을 빌려 설명할 수도 있다. 개념화와 논리를 담당하는 아니무스가 아니라, 이미지와 상상력과 감정의 흐름이 속하는 아니마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사유. 촛불은 그 아니마적 조건을 구현하는 빛이다. 의식을 완전히 지배하지도 않고, 무의식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침잠하지도 않는, 그 사이 어딘가의 불안정한 균형.
촛불 앞에서의 사유는 명확성을 향하지 않는다. 세계를 흐릿하게 견디는 방식, 의미를 고정하지 않은 채 그 안에 머무르는 능력.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사유의 방법, 촛불의 몽상이다.
3. 그리고 스크린의 빛 앞에서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촛불』은 낯설어진다.
촛불은 느리고 불안정하며, 언제든 꺼질 수 있다. 반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빛은 다르다. 지속되고, 과잉이며, 끊임없이 갱신된다. 스크린은 사물을 흐릿하게 두지 않는다. 정보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의미를 빠르게 전달하고, 주의가 분산되기 전에 다음 화면으로 넘어간다.
이런 조건 속에서 몽상은 쉽게 무의미한 것, 비생산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세계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빠르게 처리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환경에서, 흐릿하게 머무르는 사유는 배제될 뿐 아니라 아예 인식조차 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면 질문이 돌아온다. 우리는 여전히 촛불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는가. 지금 이 글을 치고 있는 나는 촛불이 아닌, 스크린의 불빛 앞에서 좌에서 우로 글을 완성하고 있다. 세계를 명확하게 파악하려는 충동을 잠시 내려놓고, 의미가 고정되지 않은 상태를 견디는 일이 가능하기는한 일인가. 개인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이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촛불』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가능성을 남긴다. 이해가 아니라 보류를, 해석이 아니라 감각의 지속을 요구하는 사유의 방식.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과도하게 선명해진 세계에서 드물게 남아 있는 사유의 태도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지나치게 모호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불친절하다. 단,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우리는 얼마나 명확하게 이해하려 애쓰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는가.
스크린 앞에서 글을 쓰고, 그러한 것이 더 마음이 편안해진 입장에서는, 바슐라르의 책이 솔직히 이해의 폭력을 유보하려는 시도일까, 아니면 단지 그것을 회피하는 또 다른 방식일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하지만 그는 사유를 재배치하는 시도를 촛불을 통해서 시도했고, 그 시도는 이 글이 모호한 질문이나 인상으로 남을 정도로 꽤 나라는 독자에게는 먹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