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낭만학개론 -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앙상블

글 입력 2024.03.24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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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 잊고 있던 것들이 떠오른다.


어릴 적 다녔던 피아노 학원의 연습실에는 당대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쇼팽도 그중 하나였다. 연습실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박혀 있던 쇼팽은 바흐와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연습실 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숙제로 내준 연습곡 따윈 잊고 내가 진짜 연주하고 싶었던 노래들을 맘껏 칠 수 있었던 시간.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악기가 내게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느껴진 게. 물론 그 결말이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어느덧 피아노를 손에서 놓은지도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은 내게 소중한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한편 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화들 역시 내게 특별하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 부모님이 나와 동생들에게 맨 처음 보여주었던 영화가 바로 <원령공주>였다. 그 영화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변덕과 싫증이 심한 내가, 한 번 본 건 좀처럼 다시 꺼내보는 일이 없는 내가 그 영화만큼은 10번을 넘게 보았다(덕분에 아직까지도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 중 나의 최애는 <원령공주>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 그런 낭만을 잊고 산 지도 오래되었다. 음악은 이미 한참 전에 그만두었고, 지난 2013년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하면서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 역시 점차 내 곁에서 멀어졌다(그런 의미에서 작년에 나왔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어찌나 반갑던지). 그런 와중에 이번 공연을 만나게 되었다. 쇼팽과 지브리의 만남. 어린 시절 내 조각들의 재회. 그 사실만으로 나의 마음은 공연 며칠 전부터 세차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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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찾아오고 객석엔 적막이 흘렀다. 곧 무대 위로 사람들이 들어섰다. 본격적인 공연의 시작이었다. 포문은 쇼팽의 왈츠 7번 올림 다단조 ‘작품 번호 64-2’와 <마녀배달부 키키>의 ‘바다가 보이는 마을’이 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왈츠는 기본적으로 3/4박자의 춤곡이다. ‘춤’이라는 분명한 목적 때문인지는 몰라도 왈츠는 다른 클래식 장르와 비교해도 매우 정형적이다. 허나 쇼팽의 왈츠엔 오묘한 부분이 있다. 분명 왼손은 기존의 3박자를 따라가고 있으나 오른손은 그렇지 않다. 왼손이 보내오는 박자를 끊임없이 쪼개고 변주하며 음악의 장르를 잠시나마 잊게 만든다(심지어 어떤 부분에서는 재즈처럼 들릴  때도 있다). 거기다 중간중간 들어오는 불협화음과 하향식 멜로디 전개는 불안하고 서글픈 감정을 더하여 장르의 목적을 망각하게 만든다. 쉽게 말해 쇼팽의 왈츠는 춤이 아닌 다른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처럼 느껴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쇼팽은 이 곡을 죽기 2년 전에 완성했다고 한다. 쇼팽의 말년은 망가진 건강과 궁핍한 경제사정으로 인해 불행했다. 그래서일까. 왈츠 7번 올림 다단조 ‘작품 번호 64-2’의 선율은 전체적으로 비탄에 잠겨 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왈츠라는 음악적 형식을 만나 뛰어난 시너지를 발휘한다. 오른손은 삶의 서글픔을 노래하지만 왼손은 우직하게 3/4박자를 유지하는데 이는 암울한 순간 속에서도 묵묵히 고통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누군가의 결기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쇼팽이 연주하고 싶었던 그런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다음이 <마녀배달부 키키>의 ‘바다가 보이는 마을’인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영화 속에서 우연히 톰보의 친구들을 만난 키키는 당연하게 생각하던 자신의 모습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화려한 치장을 하고 놀러 다니기 바쁜 톰보의 친구들과 달리 키키는 언제나 까만 옷차림에, 돈이 없어 갖고 싶은 신발 하나 제대로 사지 못했다. 기분이 우울해진 키키는 홀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순수하고 밝은 키키는 어디론가 가버렸나 봐.” 그리고 그날 이후, 마치 거짓말처럼 키키는 하늘을 날지 못하게 되었다.


더 이상 하늘을 날지 못하게 된 키키는 무력감에 빠졌다. 하나뿐인 친구인 검은 고양이 지지의 말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마법의 힘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불안한 생각으로 가득해질 무렵, 키키에게 숲에서 만났던 우르슬라가 찾아왔다. 키키의 이야기를 들은 우르슬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르슬라: 마법이나 그림이나 비슷하네. 나도 그림이 안 그려질 때가 종종 있어.

 

키키: 정말? 그럴땐 어떻게 하는데? 예전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서 날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

 

우르슬라: 그럴 때는 버둥거릴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리고, 그려대는 거야.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건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특별한 일이었다. 하늘을 난다는 것도 마찬가였다. 그렇기에 때로는 뜻대로 되지 않는 슬럼프를 겪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키키’라는 존재가 무너지진 않는다. 키키에게 필요한 건 그동안 당연한 것인 줄 알았던 모든 것들에 대해 특별함을 아는 것뿐이었다. 왜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모습일까? 왜 나는 날지 못하게 된 걸까? 마치 쇼팽의 왈츠 리듬처럼 슬럼프를 겪는 와중에도 그 하나하나의 물음에 우직하게 답을 찾았던 키키는 기어코 다시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 그녀 자신의 본래 리듬을 되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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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이 깊었던 넘버는 에튀드 3번 마장조 ‘이별의 곡’과 <천공의 성 라퓨타> 중 ‘너를 태우고’였다. 어른이 되어 사느라 잠시 잊고 있던 낭만에 대해 떠올려보자. 낭만이란 무엇인가. 낭만은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어쩌면 이 넘버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하기 위해 존재하는게 아닐까 싶다.


‘에튀드’는 특정 악기를 연습하기 위해 만든 독주곡을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장르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빛을 받지 못하였다. 허나 쇼팽은 에튀드를 연습곡이 아닌 연주곡으로 바라보았다. 피아니스트의 연습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 본연의 가치와 역할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덕분에 쇼팽의 에튀드는 연습실이 아닌 각종 콩쿠르와 연주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음악이 되었다.


한편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극중 시타는 파즈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난 할머니에게서 주문을 많이 배웠어. 물건을 찾거나 병을 고치는 주문. 사용해서는 안 되는 주문도 배웠지. 멸망의 주문. 주문 실력을 높이려면 나쁜 주문도 알아야 한대.” 허나 극의 말미에 이르면 아이들은 스스로 멸망의 주문을 외쳤다. 위험한 주문이었지만 그 주문만이 길어올릴 수 있는, 어른들의 탐욕에 맞설 수 있는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낭만과 희망은 발명이 아닌 발견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풀꽃도 오래 보면 사랑스럽다는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쇼팽은 연습곡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았고, 시타와 파즈는 라퓨타의 멸망을 통해 비로소 두둥실 떠오르는 (거대한 나무로 대표되는)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지평선이 빛나 보이는 건 어디엔가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지구는 돌고 있어. 너를 태우고서. 언젠가 반드시 만날 우리들을 태우고.” 음악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를수록 오래 전 들었던 노랫말이 머릿속에서 함께 재생되었다. 어린시절 멋모르고 흥얼거렸던 그 가사의 의미를 이제야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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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바깥은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 지상으로 내려가는데 뒤에 있던 커플이 방금까지 연주되었던 음악들을 흥얼거렸다. 나 역시 유튜브 플레이 리스트에서 지브리와 쇼팽의 음악을 찾았다. 그 선율에 귀를 기울이며 잊고 있던 것들을 하나둘씩 떠올려 보았다.


낭만은 이미 존재한다. 다만 당신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 그러니 주변을 잘 둘러보자.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인생의 회전목마’에 ‘너를 태우고’ ‘바다가 보이는 마을’로 데려다줄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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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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