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극 (해)보기를 권하는 이유 [공연]

무대에서 배우는 삶의 가치들
글 입력 2024.04.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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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히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연극인이 되기를 바랄 수 없다. 그러려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연극에 흠뻑 젖어 본 경험이 마음 한켠에 있었으면 좋겠다. 살면서 이따금 떠올릴 작은 보물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좀 더 욕심을 내 보자면, 기왕이면 연극을 관람한 경험보다는, 연극의 ‘퍼포머’로 직접 참여해 본 경험이기를 바란다.

 

연극을 해 본다는 것은 마음가짐의 측면에서도, 제도적 차원에서도 유달리 어려워 보이곤 한다. 수많은 대중 앞에서 조명을 받고 서는 이미지 때문인지 무언가 특별한, 선택받은 사람만이 해볼 수 있는 장르 같다. 하지만 알고 보면 기회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학교라면 연극 동아리도 있을 것이고, 학교 밖에서도 비전공생을 위한 연극 공연 수업이나 기초연기, 장면발표 수업이 풍부하게 제공되고 있다. 그것도 용기가 나지 않거나, 여건이 안 된다면 좋아하는 작품의 독백을 혼자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봐도 좋다.

 

내가 연극을 직업으로 삼지 않는 이들에게 연극을 경험해보기를 추천하는 지극히 사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조명.jpg

 

 

 

암전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처음 연극을 배울 때, 극장의 기술 감독님께서 모든 제작진을 한곳에 모아놓고 신신당부하신 사항이 있다. ‘극장 전체 암전이 있어야 할 경우 소등 전 모두에게 알릴 것’, ‘암전 때 절대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서 기다릴 것’이다. 극장 문을 여닫는 것을 본 이들은 알겠지만, 온몸으로 여닫는다는 생각이 정도로 문이 두껍고 무겁다. 그 이유는 관객이 공연 직전까지 겪던 바깥세상을 완전히 차단해야 연극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은 어쨌든 희곡에 쓰인 세계의 환상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 환상을 조명으로 선명하게 구현해내기 위해서는 바깥의 빛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극장의 암전은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암흑이다. 그 암흑 속에서 움직이는 건 당연히 위험하다. 조금 무섭게 느껴지지만, 계획한 대로 무대가 완벽하게 구현되기 위해서는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것보다 외부의 빛이 들어와 조명의 역량을 방해하는 것이 더 문제가 된다.

 

또한, 공연이 시작되기 전의 암전은 상징적이고 의식적인 의미를 가진다. 관객에게 ‘당신이 극장에 들어서기 전까지 보았던 세상을 잠깐 지워내세요’라 말하며 극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그들을 이끄는 장치인 것이다. 연극에서 암전이 사용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극이 시작할 때, 또는 극 중간에 장면이 바뀔 때이다. 결국 암전은 과거의 무언가가 끝나고 새로운 것이 펼쳐진다는 의미이다.

 

객석에서 관객의 입장으로 지켜볼 때는 첫 암전만큼 설레는 순간이 없다. 극이 곧 시작된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무대에 서는 당사자가 될 때는 그만큼 떨리고 두려운 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순간이 끝나고 극 중 세상이 펼쳐지면 어떤 돌발상황이 일어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이제부터는 문제가 생겨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아는데, 일단 나는 공연 시간에 맞추어 내게 주어진 일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과정도 그럴지 모른다. 삶은 지나간 순간을 다시 되돌려 수정할 수 없다. 또한 새로운 일이나 변화를 앞둔 시점은 암전처럼 한 치 앞이 안 보이고 두렵다. 그래서 익숙한 과거를 끊어내는 것은 어려우며. 거기에 기대고 싶어진다. 하지만 연극의 원리를 생각하면 조금 더 용기가 나곤 한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암전 속에 익숙한 세상을 떠나보내기에 비로소 다음에 펼쳐질 세상이 온전할 수 있다. 연극을 하면서 우리는 그 상징적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몇 번이나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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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사는 법


 

일단 나는 연기 전공생이 아니며, 또한 연기를 가르치는 방법과 좋은 연기의 기준은 모두가 다르다. 내가 받았던 훈련은 전문적인 배우가 되려는 목적은 아니었음을 다시금 밝힌다.

 

처음 연기를 배울 때 가장 강조 받았던 것은 ‘인물의 과거와 미래, 대사의 의미에 대한 복잡한 계산을 가지고 무대에 오르지 말 것’, ‘지금 이 순간을 감각하고 그것들에 자연스럽게 반응할 것’ 이었다. 언젠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에 나오는 ‘로라’의 독백을 연습한 적이 있다. 자신이 고등학생 시절 짝사랑하던 한 남학생이 자신을 ‘푸른 장미’라고 불렀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대사에 등장하는 ‘푸른 장미’가 희곡 <유리 동물원>에서 어떤 문학적 상징을 가지는지 정확히 몰라서 연기가 완전히 막혔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선생님이 반문하셨다.

 

“(장면이 진행되는) 그 순간에 로라도 푸른 장미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까?”

 

작품의 의미와 상징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절대 아니다. 작품 전체에서 그 장면이 무슨 역할을 하며,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 그 장면에서 인물은 뭘 원하는지, 장면을 만들기 위한 뼈대를 세우는 장면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직접 움직이며 장면을 연습하는 순간, 무대에 선 순간에는 아니다. 로라는 그 장면에서 푸른 장미가 무슨 뜻일지를 고민하면서 대사를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순간 떠오르는, 자신을 ‘푸른 장미’라 불렀던 남학생의 기억과 이미지에 반응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는 쉽게 들어보았을지도 모른다. 인물이 결말부에 가서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이라도, 배우는 매 순간 ‘내가 나중에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연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나오는 한 장면을 파트너와 연기한 적이 있다. 테베의 왕인 크레온은 엄격한 법을 제정했으나, 공주인 안티고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그 법을 어긴다. 그리고 법을 어긴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은 사형이다. 안티고네가 법을 어긴 사실이 드러나고, 크레온과 안티고네가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다.


 

크레온    그건 법으로 정한 것이니까.

안티고네   무슨 법이요?

            그 법은 제우스 신의 법이 아닙니다.

 


왕과 공주의, 목숨이 오갈 수 있는 싸움이지만, 이 순간 안티고네는 ‘나는 공주이며 신분이 높다. 이 이후에 나는 동굴에 갇혀 죽을 것이다’ 라고 긴 계산을 하면서 답하지 않는다. 다만 ‘내 모든 걸 걸고도 나는 내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와 목표를 가지고, ‘법으로 정한 것이니까’라는 방금 들린 말에 반응하여 반문하는 것이다. 안티고네를 연기하는 이도 마찬가지다. 인물의 목표를 분명히 가지고 지금을 잘 보고 듣는 것이 연기에 있어서 집중력이라 불리곤 한다. 그리고 이 집중력이 공연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우리의 삶은 대본처럼 인물의 결말과 운명까지 정해주진 않는다. 하지만 날마다, 해마다 어떤 삶이 반복되는지, 나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지는지, 그런 것들은 정해져 있는 느낌이다. 그 속에 우리는 지난하게 고민한다. 대체 난 어떻게 지난 세월을 보냈으며, 어떤 미래가 예견되는지. 주로 자신에 대한 원망과 자책에 가깝다. 그럴 때면 연극처럼 지금 이 순간 나의 세상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것이 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향이 아닐지 생각한다. 물론 전제가 있다. 연극의 장면에 살아있기 위해서는 인물과 대본 분석이 필요하다. 인물의 전사를 파악하듯,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쌓인 서사를 없는 셈 치는 게 아니라 오늘의 근거와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나라는 인물이 추구하고 목표하는 것이 뭔지,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마음속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나에게 닥쳐오는 모든 것에 의미를 찾으려고 지독하게 매달릴 필요도 없다. 순간 다음에 또 순간이 오니까, 그렇게 지금에 집중해 살아가다 보면,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극 중 요소들의 의미는 차차 드러난다.

 

 


부정적 감정들과 함께하기


 

연극은 결국 인물의 삶을 이해하면서 만들어 가는 장르이다. 당연하면서도 신기한 사실은, 해가 바뀌고 나이가 들면서 같은 인물과 같은 대사도 다르게 와닿는다는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아기 공룡 둘리’를 보면서 어릴 때는 둘리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데, 어른이 되면 고길동에게 이입하게 된다는 말과 비슷한 결인 것 같다. 연극은 사람의 행동이 중심이 되는 장르이고, 아는 만큼이나 경험한 만큼 보이는 장르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렇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인물이 있을 때, 배우가 한 번도 사랑하는 무언가를 잃어 본 경험이 없다면 그 역할을 이해하고 연기할 수 있을까? 꼭 연인이라는 ‘인간’이 아니더라도, 절실하게 아끼던 존재와 떨어지게 된 아픔이 있기 때문에 작품과 인물의 이해와 연기가 가능한 것이다. 연극을 이해하고 연극을 만든다는 건, 인물과 비슷한 나의 아픔에 적극적인 역할과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픔의 모습이 극적으로 보이든, 사소하게 보이든 그런 건 상관없이.

 

나는 린 노티지 작 <스웨트>에 나오는 제시의 대사를 좋아한다. 오래도록 한 지역의 공장에서 일하며 그리 단란하지만은 않은 가정을 꾸린 제시가, 여행과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 나오는 대사이다.


 
난 세상을 좀 더 봤으면 좋았을 것 같아. 버크 카운티를 떠니서, 단 일 년 동안이라도. 그게 후회가 돼. (...) 뭔가를 알고 싶어지기 전까지는 자기가 모르는 게 뭔지를 모르잖아. 근데 그러고 나면 그때는 너무 늦는 거지. (고영범 옮김)
 

 

이 대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 역시 이제 삶에서 안정성을 버리고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해 볼 시기는 지났으며, 그렇기에 하지 못해본 것들이 유독 아쉽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지겹다, 서럽다’고 여겼던 내 삶의 태도는 이렇게 어느 순간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변모한다.


뮤지컬 <페임>에서 남자친구와 싸우고 절망과 분노를 느끼는 연기 전공생 세레나는 오히려 ‘이 감정을 기억하자’며 기뻐하기 시작한다. 연기할 때 막혔던 생생한 감정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건 내 감정이고, 나만이 가질 수 있어

(...)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없어. 내 안에 보물이 빛나고 있어.

(...)

마음이 아파도 울지 마. 그걸 이용할 수 있어.

 

 

그렇다. 부정적 감정은 연극에서 더 많은 인물과 더 많은 작품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하는 긍정적 역할을 부여받는다. 아프거나 슬프고 지난한 일이 생기면, 이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좀 좋아진다. 나는 오늘 또 한 명의 인물과 또 한 명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거라고. 내가 좋아하고 향유할 수 있는 작품들이 내 서랍 속에 몇 개 더 쌓인 거라고.

 

연극에는 커튼콜이 있다. 악역이든, 주인공이든, 단역이든 모두가 최선을 다했음을 알고 있기에 보내는 박수이다. 언젠가 연극을 통해 내가 겪어 온 변화와 지금과 아픔에, 그리고 그 주인인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보면 어떨까.

 

 

[박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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