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Let It Bea - 연극 비Bea

내 이름으로 살다 가는 일엔 내 결정이 가장 중요해요
글 입력 2024.03.0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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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극 <비Bea>의

내용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


 

최근 전 네덜란드 총리 부부가 동반 안락사를 선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동반’ ‘안락사’ 두 단어 모두 낯설게만 느껴졌다. 평소 죽음은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단 다가오는 것 내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 기사를 접한 뒤 바라본 세상에는 죽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싶은 사람들과 그들의 결정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죽고 싶다”라고 말하는, 만성체력저하증을 가진 이십 대 여성 비를 만났다.

 

 

Bea_poster_b.jpg

 

 

연극의 첫 장면은 비와 비의 새로운 간병인 면접을 보러 온 레이의 첫 만남으로 시작된다. 비어트리스가 본명인 비는 레이에게 자신을 비(Bea)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비는 레이에게 자신의 엄마인 캐서린에게 보낼 편지 대필을 부탁한다. 자신이 엄마에게 직접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며, 편지로 본인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그 내용은 엄마에게 제 죽음을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엄마 나는 8년 동안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지난 7년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이요. 내가 이 문제를 아주 다양한 각도에서, 자세히 들여다봤다는 사실을 믿어주세요. 360도 모든 각도에서, 한 번에 1도씩, 아주아주 꼼꼼하게.”
 

 

극이 시작된 후 예쁜 옷을 입고 구두를 신은 채 침대 위에서 춤을 추며 시종일관 명랑했던 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표정, 말투와는 상반된 내용으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해 달라는 무거운 부탁이었다.

 

그제야 비의 주변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는 병명을 알 수 없는 만성적 체력 저하 증상으로 팔 년의 시간을 침상 위에서만 보냈다. 그간 간병인이 밥을 먹여주고, 하루 삼세번 번 약을 투약하고, 배변 활동을 돕는 등의 타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하는 과정을 전부 온전한 정신으로 견뎌야 했다.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없었고, 성적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원인 모를 병이 생기기 전, 열두 살까지의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삶의 감각들은 이제 그에게 없었다.

 

그런 비는 간절하게 말한다. 자신이 지난 시간 동안 이러한 몸으로 사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노라고. 그 생각의 결론은 자신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비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캐서린에게 직접 말하는 대신 편지를 쓴다.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편지를 택한 이유는 아마도 비가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에 자신이 오랫동안 치열하게 고민해서 내린 결론을 한 글자 한 글자 세심하게 다듬어 엄마에게 전달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위의 인용한 비의 대사처럼, 비는 삶이 아닌 죽음이라는 선택지를 끊임없이 고민해 왔을 것이다.

 

그 편지를 받은 캐서린은 비가 자신에게 살인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며, 자신을 생각하지 않은 결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비와 캐서린의 의견 대립은 현실 세계에서도 논쟁적인 안락사에 관한 의견 대립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아직 의사조력사 혹은 적극적 안락사를 합법으로 인정한 나라는 많지 않다. 극 중 인물들의 대사로 추정하건대, 비와 캐서린이 사는 곳 역시 적극적 안락사는 불법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캐서린의 직업은 변호사이다. 그의 정장인 옷차림과 딱딱한 말투, 간병인 레이에게 원칙을 준수해달라고 부탁하는 모습들을 보면 상당한 원리원칙주의자로 보인다. 그런 캐서린이 비의 가족으로서 비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더불어 자신의 직업적 소명(혹은 윤리)이 누군가의 죽음을 돕는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도록 했을 것이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과 그것을 돕는 일은 살인이라고 말하는 사람, 이 둘의 입장 사이에서 우리는 대체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나 자신에게 있는지부터 가까운 사람이 더 이상 자신에게 생의 의지가 없다고 밝혔을 때 이를 도울 수 있는지, 비와 캐서린에게 각각 대입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이런 모녀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간병인 레이는 어딘가 부산스럽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믿음직스럽지 않은 구석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톡톡 튀는 레이의 모습은 죽음을 도와달라는 비의 부탁, 그런 부탁을 전해 받은 캐서린의 무거운 마음을 잠시간 내려놓고 설핏 웃을 수 있도록 만드는 매력을 가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레이는 자신과 성별도 다르고, 처한 환경도 다르고, 간호 대상으로 만난 비를 정성껏 돌본다. 비의 이야기에 언제나 귀 기울이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레이가 비를 위해 비의 아름다운 옷을 입고 춤을 추거나, 실감 나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 더 나아가 비의 무리한 부탁까지도 들어주는 모습을 보면, 레이가 비를 단순 간병인 대 환자로서 대하는 것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그를 돌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이 대하기에 어려운 인물인 고용주, 캐서린 앞에서 가끔 주눅이 든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비와 캐서린 사이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해내며 자연스레 그 둘 사이에 융화되기도 한다. 비와 캐서린이 각자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대립했을 때, 캐서린이 비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캐서린이 직접 비의 일상들을 경험하도록 돕는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비와 캐서린, 그리고 레이. 우리는 이 세 사람의 입장에 자연스레 서 보게 된다.

 

내가 만약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멀쩡한 정신으로 일평생 타인에게 몸을 맡겨야 한다면, 이 삶을 계속 유지할 이유가 있을까? 나와 가까운 존재가 나에게 자신의 죽음을 도와달라고 말했을 때 그의 결정을 지지해 줄 수 있는가? 상대방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며 나의 직업적 윤리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죽음과 생이라는 두 가지 대척점에 서 있는 결정을 내린 서로의 입장을 우리는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의문과 갈등에 빠진 우리(와 캐서린)에게 비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학창 시절, 죠앤이라는 이름의, 지금의 자신과 비슷한 만성피로증후군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모두가 조심히 대할 때 자신은 그 친구에게 엄살 부리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말이다.

 

어쩌면(이 아니라 거의 확실하게) 우리는 모두 ‘마음 맹인’이라,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아니라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영원히 불가능하다. 특히 스스로 죽고 싶다는 결정, '죽음'을 앞에 둔 결정은 더욱이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비의 결정을 캐서린이 받아 들이지 못하듯이.

 

우리는 그간 생과 삶은 소중하다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라고 배웠다. 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연극을 보고 난 이후에는 비, 레이, 캐서린이 극 중에서 노력하듯이 각자의 입장에 적극적으로 서 있기를 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비가 되어본 캐서린은 비의 결정에 동의하고 그의 죽음을 돕기로 한다.

 

 

 

스스로 내린 결정의 끝엔 자유와 행복이



비의 생일날, 비와 캐서린, 레이는 신나는 생일 파티를 연다. 그간 서로가 서로에게 지켜왔던 체면, 사회적 시선을 전부 벗어던지고 세상에서 가장 비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모여 비의 생일을 축하한다. 그 후에 비의 발작이 시작된다. 캐서린의 도움으로 수많은 알약을 삼키고, 그제야 비는 극 중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의 침대를 벗어난다. 마치 감옥처럼 그의 침대를 둘러싼 회색빛의 벽은 사라지고, 비가 밟으며 뛰노는 공간은 푸른 들판으로 변모한다.

 

비가 오랜 시간 고민해 온 죽음의 끝은, 자신의 정신을 가두던 육체에서 벗어난 자유를 얻어낸 것처럼 보였다. 그 들판을 뛰노는 비의 모습은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비라고 불리기를 바랐던 그가, 진정한 자신을 만난 것 같았다.

 

누군가는 죽음이 곧 끝이라고 할지 모르고, 죽음은 인간이 택할 수 없는 영역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비는 이제 정말 자신이 원했던 비(Bea)로 살 수 있게 되었다.

 

*

   

우리는 영원히 타인의 선택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타인의 입장을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이 더군다나 죽음의 문제라면 더욱이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서로의 결정을, 서로의 입장을, 그 사람 자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공감일지라도 ‘마음 맹인’에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연극의 막이 내려갈 때, 침대에서 들판으로 넓어진 비의 반경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속 반경이 조금 더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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