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떤 죽음은 끝끝내 무책임하다. 하지만, - 아버지의 사과 편지 [도서]

상처의 기록이라는 방식 너머로 가해자 스스로 악행의 뿌리와 줄기를 헤쳐 보는 시도
글 입력 2020.09.13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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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자신이 겪은 상처를 앞에 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자기가 아닌 타인으로서 이곳에 서있다. 타인이 되어 자신의 상처를 바라본다. 아니, 바라본다기보다 상흔의 내상內傷과 연결돼있는 시선 속으로 들어간다. 가해의 시선과 심정을 끌어내어 기어코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그 목소리는 31년 전에 응당 들었어야 마땅한-물론 애초에 이 목소리를 끌어낼 일 자체가 없었어야 하지만-것이다.

 

무책임의 무력감 앞에서 발길을 돌리지 않고 문을 두드리다가 마침내 새로운 문을 만들어 열어젖히는 실천을 이브 엔슬러는 해냈다. 어떤 상상력은 말보다 큰 용기가 되기도 한다. 이브 엔슬러가 받은, 그리고 스스로 써낸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고통과 자기 회복의 과정으로 열어 볼 필요가 있다.

 

 

 

악행의 뿌리와 줄기를 헤쳐 보는 시도


 

저자의 아버지는 31년 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자신의 범죄 사실에 대해 완강하게 부인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딸에게 행한 성적 학대가 드러나는 것을 은밀하고 교활하게, 그리고 난폭한 방식으로 은폐하기 위해 딸이 성인이 되고 난 후까지도 가스라이팅을 했다.

 

끝끝내 가해자가 살아있을 때 가해 사실을 인정받고 사과 받지 못한 이브 엔슬러는 아프지만 용기 있고 참신한 방법으로 그 기억과 대면한다. 상처의 기록이라는 방식 너머로 가해자, 그것도 아버지인 가해자 스스로 악행의 뿌리와 줄기를 헤쳐 보는 시도이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독단적이고 폭력적인, 부재하는 소통은 그(아버지)의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왔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가해 행위의 정당화라기보다는 이브 엔슬러가 아버지의 가해 행위에 대한 본질을 꿰뚫기 위한 정밀한 탐구다.

 

 

어머니가 나를 이상화한 반면, 아버지(이브 엔슬러의 할아버지)는 나를 게으르고 제멋대로에, 목표 의식도 초점도 없이 타성에 젖은 패배자로 여겼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도 아버지의 시각과 비슷했던 것 같아. 이것이 끝없는 나의 분노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구나.

 

어머니가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 사이의 차이는 나를 혼란과 절망으로 몰아갔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관심이나 능력이 없다는 의미였고, 나아가 어머니가 내게 아무 관심이 없으며 내가 하는 말을 듣지도, 나를 제대로 보지도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지.

 

 

이브 엔슬러는 가해자의 자리로 이행하여 사과를 기다리는 자신(피해자)에게 편지를 쓴다. 여기에는 줄곧 ‘진실함’과 ‘숨기지 않는’ 것에 대한 바람 같은 게 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편지에서 요구되는 건 가해 행위에 대한 장막 없는 인식과 본질적인 이해였다.

 

 
내가 보기에, 사과란 가장 근원적인 친밀함을 강조하는 행위 같구나. 만일 고백이 용서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고백하는 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완전한 맨몸이 되어야 하겠지. 이 과정이 그저 후회를 곱씹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안다. 그래, 사과에 내포되어야 할 것은 당시 상황을 만든 근본적인 요소들에 대한 재해석이겠지.
 

 

 

어떤 죽음은 끝끝내 무책임하다. 하지만,


 

이런 존재에게 어떤 이해와 인정을 바랄 수 있을까. 딸 인생의 목덜미를 잡고 놓지 않은 존재,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에게 도대체 어떤 사과를 바랄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떤 죽음은 끝끝내 무책임하다. 하지만 그 무책임 앞에서 저자는 고개를 떨구고 있지 않는다. 그를 다시 불러내어 인식을 복기하고, 감정적이지 않고 철저하게 아버지가 행한 일과 파동을-아버지 스스로-맞닥뜨리게 한다.

 

 
이제 기다림은 끝내기로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오래다. 그는 결코 내게 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상상해야만 한다. 상상 속에서라면 경계를 넘어 꿈을 꿀 수 있고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 현실과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더 이상 사과를 받기 위해 피해자가 겹겹의 수치를 느껴야 하고 그에 지쳐 주저앉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듯, 이브 엔슬러는 펜을 들고 무대 위 이야기를 꾸린다. 아픈 기억 속을 헤매는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 모두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이 고통에서 머뭇거리는 여성들의 손을 잡는다.

 

이브 엔슬러의 편지는 그가 우리의 상처에게 들려주는 솔직한 이야기이자, 자신이 부당하게 겪은 일 때문에 결코 목소리를 잃지 말라는 간절함이다.

 

 
이 편지는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나의 의지와 그에 필요한 말을 아버지에게 부여하고 사과의 언어로 표현하게 해 마침내 나를 자유롭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
 
아버지의 사과 편지
- 딸아 미안하다. 그건 강간이었다. -
 

지은이 : 이브 엔슬러
 
옮긴이 : 김은령

출판사 : 심심

분야
외국 에세이 / 여성학

규격
133*193

쪽 수 : 208쪽

발행일
2020년 08월 14일

정가 : 15,000원

ISBN
979-11-5675-835-8 (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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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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