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돈선필, 카미유 앙로, 이미래 [시각예술]

세 작가의 전시를 보고 나서
글 입력 2020.09.1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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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간만에 전시를 다녀왔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 중인 <돈선필: 포트레이트 피스트>, <카미유 앙로: 토요일, 화요일>, <이미래: 캐리어즈>다. 몇 주 전부터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출을 자제하고 있던 차에, 국공립미술관이 모두 잠정 휴관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미술관에 대해 생각하며 쓴 글이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미술관>, 아트인사이트, 09.02)


코로나로 인해 사회의 많은 영역이 타격을 받고 있고 예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숱한 갤러리가 문을 닫았고 예술가의 생계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상황에 마음이 불편하고, 예술계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가 이대로 지속될까 걱정이 되었다. 전시에 가고 표를 사는 관람자가 그들에게 가장 필요하다는 걸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외출을 감행할 순 없었다. 불필요한 외출 자체가 민폐로 비칠 수 있는 상황이기에  보고 싶다고 해서 진행 중인 전시를 마음껏 보러 다니는 건 무리였다. 이에 7월에 예술의 전당을 다녀온 이후 이렇다 할 문화생활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예술에 대한 갈증을 느끼다 심사숙고 끝에 현재 진행 중인 전시 중에서 가장 보고 싶은 하나를 골랐고, 사전예약 후 최대한 안전하게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사람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를 피하고, 딱 전시만 보고 집으로 돌아오기로. 기왕에 다녀오는 전시이기에 충분히 감상하고 이해해서 소화시켜야지 다짐하고는 아트선재센터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하의 글은 아트선재센터 전시 팸플릿에 기반하여 개인적인 해석을 더한 감상문이다.

 



돈선필: Portrait F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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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표를 작성하고 사람이 몇 없는 쾌적한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자 얼굴들이 가장 먼저 보인다. 눈코입이 제대로 달려 있는 얼굴들 말고 여러 상태의 얼굴, 이목구비의 자리에 피규어가 붙어있는 얼굴들이다. 포트레이트 피스트는 우리가 사용하고 또 이용당하는 얼굴이 가진 힘과, 초상의 이미지를 탐구하는 작업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얼굴들을 마주한다. 주말 드라마 속 배우들의 얼굴, 학습지 책 표지에 웃고 있는 얼굴, 자주 하는 게임의 캐릭터 얼굴, 방금까지 보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얼굴까지. 얼굴의 이미지는 신체의 일부 이상의 의미를 가지면서 언제나 무언가를 대신하는 위치에 있다.


작가는 일본식 애니메이션 캐릭터(캐라)가 가지는 특이성에 집중했다. 이 캐릭터들을 떠올려 보면 이목구비가 다 비슷비슷하다. 그들은 대신 특이한 머리 모양이나 눈동자 색,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의복이나 특이한 말투 등으로 구제화된다. 각 인물을 구별하고 알아보게 하는 요소가 얼굴이 아닌 그 외의 부수적인 특징들인데, 이런 이미지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우리들은 캐릭터를 사물에 가까운 상태로 받아들인다.


이와 반대로 리얼리티에 집착해 가상의 얼굴 이미지에 지나친 현실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나 게임 산업을 떠올려보면 캐릭터의 외향이 사람과 꼭 닮은 모습으로 디테일하게 다듬어지는 모습이다. 이런 현상이 앞서 말했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에게도 적용될 때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캐라는 사실상 빈 얼굴인데 이들이 움직일 때의 부드러운 옷감 표현이라던지, 실제처럼 흩날리는 머리카락,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는 고해상도의 화면은 언캐니한 리얼리티를 낳는다.


얼굴만으로는 얼굴의 기능을 해내지 못하는 캐라가, 고해상도의 리얼리티를 몸에 입으면서 실재와 가까워지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사용하는 '얼굴'이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카미유 앙로: 토요일, 화요일



★Camille-Henrot_2.jpg

 

 

전시 제목이 토요일, 화요일이라는 게 재미있었다. 이번 전시가 토요일과 화요일이라면 자연히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일요일 전이 있을 것이고 작가가 각 요일을 테마로 풀어나갔을 이야기들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일주일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시간 체계다. 그런 점에서 일주일을 구성하는 각 요일에 삶의 특정한 부분들이 정형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행위라면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행위, 금요일엔 불금을 즐기는 행위들이 그렇다. (지금은 불금이고 뭐고 집에 있어야 하지만)


작가는 문화인류학, 신화학, 종교, 소셜 미디어 그리고 정신분석이론을 참조 삼아 일주일을 구성하는 요일들을 살핀다. 이번 전시는 그중 '토요일'과 '화요일'에 관련된 작업이다. <토요일>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주목한다. 이 영상 작업은 종교와 사회의 특징적인 부분들을 편집하여 실재와 허구를 분간하기 어려운 형식으로 풀어낸다.


<화요일> 작업이 특히 인상 깊었다. 영상, 체인에 묶여있는 조각 작품, 그리고 직접 신발을 벗고 올라갈 수 있는 매트로 구성된 화요일은 북유럽 전설 속 전생과 승리의 신을 일컫는 티르(Tyr)를 어원으로 두고 있다. 영상에선 경주마가 매끄러운 근육을 움직이며 달리고 호흡하는 이미지, 매트 위에서 훈련하는 주짓수 선수들의 모습이 재생된다.


느리고 끈적한 템포의 음악과 함께 슬로 모션으로 편집된 이 이미지들은 어딘가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긴다. 관능적인 사운드 트랙 위에서 펼쳐지는 경쟁은 본래의 전투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신체의 아름다움에 집중하게 한다. 이는 기존의 미디어에서 여성이 시각적 쾌락을 위해 관찰되었던 시점을 전복한다는 의미까지 나아간다.


매트 위에서 구르는 영상 이미지의 연장선으로 바닥에 놓인 매트는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푹신하게 밟혀 다리에 약간의 힘을 줘야 한다. 때문에 실제로 근육의 긴장을 느끼면서 힘과 권력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성과 신체가 모두 작품의 주제에 동화되는 기분이랄까. 느릿하게 울리는 사운드를 들으며 천천히 걷고, 체인에 매달린 조각들을 보면서 '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힘겨루기를 하며 상대를 밟고 올라와 승리하려고 하는 움직임. 그 움직임을 다르게 보면 승리와 항복의 양가적인 속성이 공존하는 팽팽한 에너지의 응축이다.

 



이미래: Carri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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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어(carrier)는 사용할 수 있고 무언가를 담아낼 수도 있는 어떤 것이다. '캐리어'는 임신한 여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옮기는 수단을 의미하며,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혈관, 용기, 교통수단을 지시할 수 있다. 동사 형태 '캐리'는 아이를 '가졌다', 병이 '있다', 액체나 전기가 '흐른다', 무거운 것을 '옮긴다', 어떤 아이디어를 '시도한다'라는 것을 모두 의미한다."


3층으로 올라가면 투박한 철재 벽이 가장 먼저 보인다. 오일탱크를 연상시키는 두껍고 거대한 벽이다. 벽에 가려 작품이 드러나지 않을 때까지 청각에 집중하게 되는데, 액체가 어디에선가 불쾌하게 뿜어져 나오고 물이 새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곧 시야에 들어오는 조각 작품은 천장에서부터 길게 매달려 늘어진 형태였는데 빈 틈으로 액체가 빗겨 나오고 있었다. 뒤에 연결된 펌프에서 계속해서 점액질이 운반되고 조각이 이를 빨아들이고 추출하는 운동을 반복하는 모습은 한눈에 동물의 소화기관을 연상시킨다. 장기 같다고 생각되는 순간 조금 메슥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매스꺼운 소리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설치작품 <캐리어즈>. 전시공간에는 이와 대조되는 다른 여러 조각 작품들이 얌전히 누워있다. <캐리어즈를 위한 콘크리트 벤치>는 관람객이 앉아서 전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든 콘크리트 캐스팅 조각이다. 여기에 앉으면 바로 눈 앞에서 <캐리어즈>가 점액질을 운반하고 뿜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미래의 <캐리어즈>는 '보어(vore)'라는 개념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보어'는 살아있는 사람이나 생물을 산 채로 집어삼키거나 먹히는 행위에 대한 페티시즘을 뜻한다. 공포영화에나 나올 듯 한 개념이지만, 관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집어삼켜져서 그 대상의 속에 존재하거나, 대상을 신체에 넣음으로써 대상에 대한 거리를 없애는 것이다. 대상 속에 존재하고, 대상과의 거리가 무화된 상태. 자연스레 임신한 여성이 떠오른다.


"캐리어즈는 혈액, 병균, 영양소 등 신체 내부를 이동하는 여러 물질의 원초적인 움직임을 혼유 하면서 가장 내밀하고 신체적인 감각의 자리에서 세계와 포개어지는 경험을 제안한다."

 

이미래의 작품은 벽에 상영되고 있는 <잠자는 엄마>의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태아, 생명, 순환과 죽음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잠자는 엄마의 모습은 평온해 보이지만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모습은 죽음의 모습과 꼭 닮아있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신체 기관처럼 운동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캐리어즈>와 잠잠히 누워있는 <누워있는 모양>, 벽에 투사된 <잠자는 엄마>의 이미자가 한 전시 공간 안에 병치되어 인간, 또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가진 양가성이 드러난다.

 

*

 

'미술관은 특수성을 띈 공간이다. 움직이고 소리 내는 작품 앞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시선을 옮기며 순간의 연대감을 느낀다. 대놓고 관람객 간의 상호작용을 유도하는 작품 앞에선 조금 수줍어도 적극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여 본다. 미술관에 간다는 건 단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보러 간다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일상의 흐름에서 벗어난 예술적 공간에서 체험하며 느끼고 공감한다는 의미였다.'


온라인 미술관에서 만족하지 못하던 내가 지난 오피니언에 쓴 글이다. 간만에 전시공간에서 뚜벅이며 걸어 다니면서 공간성에 대해 다시 환기했다. 소리가 울리고 물을 뿜어내는 작품이 놓여있는 공간, 매트 위에서 다리 근육을 팽팽하게 만드는 공간, 작가가 설치한 소파 위에 앉아 작가가 의도한 대로 의미를 형성해나가는 공간. 역시나, 우리는 그곳에 가야 한다. 언젠가 다시 마스크로 가리지 않은 자연한 얼굴로, 가벼운 마음로 놀러 다닐 날이 빨리 돌아오길 기원한다.

 

 

참고 - 아트선재센터 전시 팸플릿

 

 



[송민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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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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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하늘
    • 아름다운 글이네요 앞으로 더 많이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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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맛있는녀석들
    • 전시를 보고도 충분히 작가의 의도를 몰랐는데  이 글을 보니 정확하게 이해가 되네요~~개인적으로 캐리어즈 가 진짜 충격적이기도하고괴기스럽기도 했는데 그 의미는 진짜 심도깊었던거 같아요
      한번더 생각 할수 있게 되어 기쁘네요~~
      해설 감사합니다 에디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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