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알록달록한 반창고 아래에는 [영화]

영화 <우리들>
글 입력 2020.09.02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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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슬레이트 지붕, 구불구불한 골목길, 별로 특별하다 할 것이 없는 동네 뒷산, 말라버려 바닥이 보이는 자그마한 웅덩이. 깨진 거울, 액자 등 쓰레기가 모여 있던 초등학교 뒤뜰. 정말 특별하지도 않은 것들인데도 그 모든 것들이 가슴을 두근두근 거리게 했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 1학년 재학 중, 글쓰기 교양 수업에서 썼던 글의 첫 문장이다. 당시에는 내 기억 속 추억들이 너무 반짝거려서 친구들과 함께했던 그 순간을 마냥 예찬했지만, 사실 그 찬란함은 그다지 온전한 기억이 아니었다.

 

얼마 전, 초등학생 때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지금이야 글을 쓸 때 마음속 외침을 다듬고 또 다듬어 글을 써 내려가지만, 당시에는 온갖 감정을 그대로 글에 표현했다. 과거의 글은 지금의 내 기억과 조금 달랐다. 친구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기록도 많았지만, 친구에 대한 미움을 여과 없이 담아낸 글도 많았다.

 

마냥 긍정적인 일들만 기억 속에 남아있었는데, 글 속에는 내가 누군가와 주고받은 상처 또한 존재했다. 무려 담임선생님이 검사를 하는 일기장에 그런 글이 적혀있었으니, 그때의 우리들은 서로에게 얼마나 솔직한 존재들이었을까?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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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은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의 이야기이다. 언제나 혼자인 외톨이 선은 방학식 날 전학생 지아를 만난다. 서로의 비밀을 나누며 순식간에 단짝 친구가 된 선과 지아는 즐거운 여름 방학을 보낸다. 하지만 개학 후 학교에서 만난 지아는 선에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선을 싫어하는 보라 무리와 어울린다. 선은 이유도 모른 채 좋아하는 친구와 멀어지고, 둘의 관계는 뒤틀린다.


선, 지아, 보라를 보며 굳이 기억하고 있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미묘한 온도가 떠올랐다. 영화를 보는 사람마다 좀 더 공감하고 이입하는 인물이 다를 것 같다. 내가 처음 <우리들>을 봤을 때는 선이에게 유독 시선이 갔다. 내가 누군가에게 뱉고 던진 말과 시선보다는, 나를 둘러싼 적막한 공기와 그 속에서 침잠하는 마음만 기억 속에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일기장을 열어보니, 나는 상처 받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상처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존재이면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동시에 그 발로 누군가를 내쳐버리기도 하는 순간들을 겪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저 시절에 한 번도 외로워본 적 없다고,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았고, 상처 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나는 어떤 순간에는 선이었고, 지은이었고, 보라였다. 관계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선을 나누며, 하얀 분필로 금을 그어놓고 ‘우리’와 ‘너’, 혹은 ‘너희’를 구분 짓던 순간들이 있었다. 어떤 날은 누군가에게 선을 긋고, 어떤 날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선을 긋고, 어떤 날은 내가 그 선을 밟아 튕겨 나가기도 했다.

 

아직 여물지 못한 몸에서 나오는 말, 몸짓, 시선은 우리들의 여린 마음에 쉽게 생채기를 냈다. 아이러니하게, 상처로 얼룩진 가여운 마음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것 또한 서로의 말, 몸짓, 시선이었다. 우리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알록달록한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다. 깨끗하게 아문 상처도 있을 거고, 흉터를 남긴 상처도 있을 거고, 아직 아물지 못해 따끔따끔한 상처도 있을 거다.

 

<우리들>은 우리의 겉을 덮고 있던 반창고 속의 흔적들을 마주하게 한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 10년도 더 전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지금 떠올리는 감정의 결이 그때와 완전히 똑같을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들>은 최대한 사려 깊고 섬세하게, 지금의 우리가 그때의 우리를 마주하게 한다.

 

 

 

우리들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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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첫 장면에서 반 아이들은 체육 시간에 피구를 한다. 선이는 팀을 정하는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남겨지고, 금을 밟았다는 이유로 아웃되기까지 한다.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체육 시간이다. 피구 팀을 정하는 과정에서 이번에는 지아가 마지막까지 남겨진다. 그리고 피구를 하던 중, 한 친구가 지아가 금을 밟았다고 말한다. 잠시간의 언쟁이 오가고, 상황을 가만히 바라보며 머뭇거리던 선이는 외친다. “야, 한지아 금 안 밟았어! 아니, 진짜 금 안 밟았어. 내가 다 봤어!”

 

첫 장면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선이는 마지막에 목소리를 낸다. 선이와 지아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 것 같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선이는 지아 편에 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이와 지아가 바로 단짝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마지막에 카메라는 금을 사이에 두고 양 옆에 선 선이와 지아의 어색한 모습을 비춘다. 선이는 지아를 흘끗 쳐다보고, 지아는 선이를 흘끗 쳐다본다. 그리고 결국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다.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는 안다. 선이와 지아가 관계라는 넓은 바다를 헤쳐 나가며, 조금씩 단단해질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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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제 멋대로 삐죽삐죽하게 그어 놓은 선들이 계속 맞닿고 마모되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우리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만, 그때의 마음에 반창고를 덧대고 덧대 어른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들> 같은 과정 속에서 덜 아플 수 있는 법을 배웠고, 덜 상처 주는 법을 배워왔다.

 

우리의 그 시절은 마냥 찬란하고 벅찬, 알록달록한 순간만으로 가득했던 게 아니었다. 색색의 반창고를 떼어보면, 누군가를 밀어냈던 흔적과 누군가가 나를 밀어내 갈 곳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때를 단순히 미성숙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지금보다 여리고 약해서, 상처 입기 쉬웠고, 상처주기 쉬웠던 우리들이었다고.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면서도, 서로에게 알록달록한 반창고를 붙여주었던 존재들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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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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