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책 애호가, 내지는 ‘덕후’라고 소개할 만큼 책을 좋아한다면...? 아래 항목 중 나는 몇 개나 해당되는지 체크해 보자.
나는 남들 앞에서도 책을 읽어
나는 무슨 물건이든 책갈피로 써
나는 허구와 현실을 혼동해
나는 도서관 연체료 미납자로 수배 중이야
나는 아이들 책을 훔쳐 읽곤 해
나는 살짝 신비스러운 리얼리즘이 좋아
나는 오래된 책 냄새가 좋아
나는 글 안 써지는 병의 특효약을 찾아 헤매고 있어
나는 문장부호에 신경을 많이 써
나는 고전을 읽고 말 거야(언젠가는)
나는 '국민 소설'이 될 작품을 쓰고 있어
나는 항상 노트를 가지고 다녀
나는 글을 쓰지 않으면 못 살아
1~3개- 초수 : 책 입문자, 혹은 입덕 부정기
4~8개- 중수 : 일명 책 덕후. 아직 사회에서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9~13개- 고수 : 책이 곧 나고 내가 곧 책인 지경에 이른 경지. 나를 포함한 주변 지인들도 책 덕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이중 어디에 해당되는가? 중수부터는 아마 이 책에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성인 1인당 연간 독서량 OECD 최하위를 기록하는 우리나라에서, <책 좀 빌려줄래?>는 비주류인 ‘책’을 몰래몰래 파고 있는 ‘책 덕후’들의 공감과 웃음 포인트를 제대로 저격한다.
책 덕후가 쓰는, 책 덕후를 위한, 책에 대한 이 카툰 에세이는 덕후들끼리 공유하는 비밀 일기장이자 팬들끼리 키득거릴 수 있는 팬 페이지, 그리고 책에게 보내는 사랑스러운 연가다. 전반부는 탐독가로서 책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2차 상상물이 귀여운 그림체와 위트 있는 말장난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을 사랑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말 못 하는 내밀한 생각들을 스스럼없이 공유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가령,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어려운 책에 대해서는, ‘모임 자리에서 네 얘기를 하면 똑똑해 보일 것 같았어.’, ‘읽으면 죄책감은 해소돼.. 찜찜한 기분은 털 수 있지..’, ‘하지만 결국 코팅된 책갈피만 남을지도.’라는 귀여운 자기변명을 늘어놓는다. 어려운 책을 시도해봤다 중간에 포기해 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하며 웃을 수밖에 없다.
혹은 남의 집에 가면 책장부터 살피며 그 사람을 분석하는 습관이라던가, 요즘 유행하는 전자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내밀한 마음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뭐 어떤가! 이건 책을 좋아하는 우리만의 비밀 일기장인데!
이 책에는 또, 문학 좀 아는 사람이라면 키득거릴 은밀한(?) 유머 코드가 곳곳에 숨어있다. 셰익스피어 작품 특징과 문학 속 갈등에 대한 비유, 인간 VS 신(고전), 인간 VS 신의 부재(모더니즘), 인간 VS 작가(포스트모더니즘)를 페이지별로 재미있게 풀어낸다. 문학 속 갈등이 실린 페이지는 이미 sns 상에서 여러 번 패러디 됐을 만큼 유명하다. (또 나만 재미있던 건가...)
전반부가 책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작가의 고통과 기쁨에 관한 이야기다. 한 영화감독은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에는 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결국 영화를만든다. 그 이상은 없다.” 책 역시 마찬가지. 처음에는 그냥 책을 읽다가 점차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언젠가 작가를 꿈꾸게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대로 써지지 않는 그 고통의 밤들을 기억할 것이다. 무언가를 보았을 때 혹은 떠올랐을 때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파편의 덩어리들을 한데 이어 붙여 정교한 구조물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정말이지, 고통 그 자체다. 마감의 마법으로 간신히 원래 쓰고 싶었던 내용물의 절반 정도만 완성시킬 때의 그 아쉬움, 형편없는 내 글을 보면서 찌르는 듯한 아픔과 수치를 느껴야 했던 시간들.
그런 밤을 지새우는 창작자들에게 이 책은 글을 좀 써본 사람으로서 똑같은 위로의 언어를 건넨다. ‘나도 이랬어! 우리 모두 똑같은 터널을 지나고 있지.’ 책과 글을 사랑해서 시작한 일을 다시 책을 통해 위로를 얻는 기분이다.
69페이지, ‘어른거리는 실패의 그림자’의 한 일부분이다.
“다 시간 낭비야. 포기해. 네 글은 형편없어. (...) 그래서 이제는 실패를 끌어안으려 해. 칠흑 같은 어둠이 없다면 은은한 불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겠어?“
완벽함, 좌절이라는 악마를 물리치고 다시 은은한 빛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책에 대한 당신의 덕심을 일깨우고 혹, 다시 불을 지핀다. 종이의 발화점은 화씨 351도.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온도는 정확히 화씨 351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