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짝사랑 연대기] 에필로그 : 사랑, 사랑 결국 사랑만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고, 이야기가 타인에게 흐르게 할 수 있는 건 사랑이었다.
글 입력 2020.07.3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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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동화들, 결국 수많은 ‘타인’의 이야기


 

글짝사랑 연대기를 연재하는 내내 생각했다.

 

 
나에게 글은 어떤 의미이고
왜 써야 하는 걸까?
 

 

저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글을 쓰는 나에 대해 먼저 알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다. 2장에서도 밝힌 바가 있지만 나는 타인의 문제에 관심이 많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

 

이런 나의 꿈은 자연히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글을 써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 어떻게 타인을 이렇게 궁금해하고, 그들에게 공감과 이입을 할 수 있는 걸까 고민을 해봤다. 거듭 고민을 하다 보니 나는 어릴 적 한 장면에 도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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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 기준으로 늦은 나이에 결혼하신 부모님은 첫 번째로 얻은 딸인 나를 금지옥엽 키우셨다. 얼마나 사랑으로 키우셨는지, 기억나는 장면이 나를 품에 안고 엄청나게 많은 수의 동화책을 읽어주신 것이었다. 부모님은 귀찮으셨을 텐데도 두 분 다,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실감 나게 흉내 내주시며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각양각색의 ‘이야기’라는 것은 결국 수많은 타인들의 이야기였다.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많은 타인들의 이야기를 맞댈 수 있었다. 수많은 ‘그들’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장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현재의 나는 어릴 때 동화로 만났던 인물 중에 특히 납작한 악역으로 소비되는 마녀들 같은 존재에게 서사를 부여해주고 싶다는 꿈이 있다. 이야기 속 마녀가 언제까지 나와는 상관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어주는 건 글, 서사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은 사랑


 

동화를 많이 접하면서 자란 나는 후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들에게 이야기를 만들어서 들려주는 걸 즐기게 되었다. 어린 동생들에게 이야기가 필요했던 순간들은 이런 때였다. 먼 길을 가야 하는데 심심하다거나 힘들다고 칭얼거리거나, 밤에 두려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날 깨울 때였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좋아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아니면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 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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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최근에 나는 그 이야기를 다시 돌려받게 되었다. 내가 심적으로 힘든 일이 있어 잠이 안 올 때였다. 잠을 잘 수가 없자 나는 동생들의 방에 들어가 같이 자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흔쾌히 자리를 내준 동생들과 나란히 누웠을 때 동생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자기들이 악몽을 꿔서 자기 싫어하면 내가 해주던 이야기가 있었다고. 그 당시의 나는 동생들에게 악몽만 맛있게 먹는 도깨비 ‘꿈뭉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했다. 웃기게도 나는 내가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동생에게 들려줬다는 걸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생들은 그걸 기억해서, 잠을 못 자는 지금의 나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다정히 이야기를 들어왔던 시간이 있었기에 내가 동생들에게 애정을 담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던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란 동생들이 나에게 다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시간의 흐름을 되새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랑이 먼저 존재해야,
이야기는 타인을 향해 흐를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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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들이 나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구할 때는, 마음이 힘들 때나 지루함을 견뎌야 할 때였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나는 이 아이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새로운 이야기를 쥐어짜서 말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동생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글이라는 건 내가 누군가를, 특히 타인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어쩌면 평생을 다해 노력해도 타인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타인을 이해해보고 닿아보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시도가 나에게 글쓰기였다. 나에게 글쓰기는 나의 이야기를 타인의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영원히 멀리 떨어져 있을 나와 타인의 존재를 잇게 하는 통로이길 바랐다. 평생을 다른 시간의 축적으로 살아왔을 존재가 아니 다른 두 세계가 하나의 글로 소통하고 만날 수 있었다.

 

 

 

글에 대해서는 여전히 짝사랑인 것 같다.


 

1학기 소설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기에게 이런 내용의 톡이 온 적이 있었다. 자기가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성장해 나가는 동기들을 보면 우울해지고 자신은 글을 계속 쓸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기에 그 톡을 보면서 같이 잠시 우울해졌다. 하지만 나는 다시 일상적으로 매일매일 뭔가를 쓰고 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왜냐하면, 내가 글을 너무 좋아한다. 어느 순간, 나에겐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게 되었다. 나에게 빛나는 재능이 없다고 해도, 나는 자판 위를 막힘없이 다닥다닥 칠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러니 글을 사랑하고 쓰는 건, 내가 재능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저, 멈출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좋아하는데, ‘이제부터 ○○을 좋아하지 않아보겠어!’라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로맹 가리의 엄마는 어린 로맹 가리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하고 기대감에 부풀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너는 커서 톨스토이가 될 거야! 빅토르 위고가 될 거야!” 글쓰기 수업에서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커서 네가 될 거야. 아마도 최대한의 너일 거야.” 로맹 가리도 결국 로맹 가리가 되었다. (중략) 얼마나 평범하거나 비범하든 결국 계속 쓰는 아이만이 작가가 될 테니까.

 

출처 :재능과 반복 – 저자 이슬아 / 경향신문 기사

 

 

내가 좋아하고 힘을 얻은 글의 일부를 발췌해 왔다. 물론 내가 글로 먹고살고 싶고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다른 직업으로 살아가게 된다 해도, 내가 글을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걸 안다. 그리고 또한 내 몸에 체화된 글에 대한 믿음이 있다. 분명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고 글을 쓰다 보면, 분명 언젠가 타인의 마음에 가닿는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내가 바라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간단하다.

 

내가 바라는 미래의 내 모습은, 최대한의 내가 되어 할 수 있는 한까지 글을 사랑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닿을 수 있는 통로인 글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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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글짝사랑 연대기에 함께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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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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