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노래가 들릴 때 그대가 생각나요. [영화]

글 입력 2020.03.22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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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내에서 영화 학회를 한다. 그 때문인지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영화 추천을 하지 않는다. 그저 영화 학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주는 진입 장벽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영화적인 대화를 하고자 희망해서 들어갔던 학회는 오히려 대화를 단절하게 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영화를 추천받았다. 바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란 작품이다. 그 친구는 자신이 추천하는 자체가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안 봤다면 이 영화는 꼭 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미안한 감정을 무릅쓰고 추천하는 영화. 그렇다, 나는 이 영화를 꼭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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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의 의미



초상을 그린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영화 속 주인공의 어머니에게 초상이 필요했던 이유는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결혼할 여성의 얼굴을 보고서 결혼하고자 했던 그 시대에서 일종의 결혼 조건, 계약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림을 완성한다는 것은 그 초상의 주인공이 결혼하게 부추기는 것이다.


백작 부인의 말처럼 결혼의 당사자보다 그림이 먼저 자리 잡는다. 그림이 먼저 자리 잡은 그 공간은 자신이 30년 넘게 채워 나가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그 그림 속의 모습처럼 말이다. 본체의 자신보다 그림 그려져 각색의 절차를 걸친 여성과 결혼하기로 했던 사람이기에 주인공은 그 그림 속의 여성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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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그 초상을 그리러 온 마리안느와 초상의 당사자인 엘로이즈는 서로 적대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초반 마리안느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그저 산책을 같이 나온 사람이라고 말한다. 엘로이즈를 곁눈질로 관찰하던 마르안느는 계속해서 엘로이즈만을 생각한다. 그림을 그려야 하니 말이다. 엘로이즈가 의자에 앉는다면, 이 앞에 서 있다면. 그 질문으로 채워나간 첫 그림은 결국 만족하지 못하고 없애버리고 만다.

 

초반 백작 부인에게 그 그림이 만족스럽다고 마리안느는 대답한다. 자신의 정체를 엘로이즈에게 말하고, 그 그림을 평가받은 마리안느는 스스로 그 그림을 태워버린다. 왜 그림을 망쳐버린 것인가. 엘로이즈는 그녀에게 자신의 얼굴에 있는 슬픔, 고독은 왜 표현하지 않은 것이냐고 물어본다. 그 대답에 마리안느는 그림 속은 일정한 규칙이 있다고 그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 그림 속의 이미지로 살아야 하는 인물은 바로 엘로이즈다. 슬픔과 고독이 보이지 않는 그림 속, 자신의 슬픔과 고독을 바라봐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감정이 그림 속에 그려져 자신의 이야기를 더하길 바란다. 그저 자신의 모습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담아서  결혼할 남성에게 전한다. 그 감정이 전달되길 바란다.

 

그 이후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의 앞에서 포즈를 잡아준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보고서 그림을 그린다. 그저 그뿐이다. 상상하는 엘로이즈의 모습이 아닌 실존하는 그녀가 마리안느의 앞에 서 있다. 마리안느가 그동안 상상만으로 했던 것들이 채워지는 순간이다. 결국 마리안느는 다른 상상을 하게 되고, 결국 그 둘의 만남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졌던 상상들을 채워 나가는 것이라고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 그 사람을 파악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그림뿐이다. 결국 마리안느는 개인적으로 엘로이즈의 초상을 그린다. 그저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조그만 원판에.  마리안느는 자신의 모습을 엘로이즈가 좋아하던 책에 그려준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서로를 기억하고 싶다는 의미이고, 서로를 보고 싶다는 의미가 된다.


영화의 엔딩 다른 작품 속에서 보이는 엘로이즈는 28페이지를 붙들고 있다. 그림 속 그녀는 행복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28페이지에 머무는 한 그녀는 완전히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온전히 마리안느가 자신의 기억만으로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이다. 기억하고 싶어서 잊을 수가 없어서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이다. 결국은 끝맺음이 없었던 그들의 관계는 더욱 강렬했었다.


하지만 서로가 그려진 그림을 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그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녀들의 사랑은 무조건 이뤄져야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나중에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다시 만나는 엔딩이었다면 그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특히나 고전 시대를 자기고 이야기를 전개한 만큼이나 그저 그런 사랑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 기억이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랑이 된 것이다.

 


 

음악의 사용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영화의 대사로도 나온다. 수녀원에서 생활하면서 성당의 음악을 들었던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는 음악을 알려주고자 한다. 다양한 음악을. 표현해 달라는 엘로이즈의 말에 음악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피아노로 직접 연주한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음악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배경음만이 가득 채운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옷자락 소리는 영화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그 공간을 관객이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자연 친화적인 음악을 제외하고서 음악이 크게 두 부분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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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사용하는 장면은 타오르는 나무를 보면서 그 지역의 여성들이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그 음악도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이 타오르면서 중단된다. 앞서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떠날 수 없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음을 붙여서 노래로 만든 것이라고 전했다. 어쩌면 엘로이즈는 현실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엘로이즈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을까.

 

엘로이즈에게 ‘신분층의 여성’이란 타이틀은 불꽃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현실적 좌절감이자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느끼는 무력감이다. 불이 붙은 그녀의 치맛자락은 다시 엘로이즈를 잡는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구하러 오는 사람은 바로 마리안느다. 마리안느의 도움으로 현실에서 벗아 나서 자유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바로 그들이 첫 키스를 하는 장면이다. 결국 다가오는 화가가 있었기에 엘로이즈는 용기 내 마리안느에게 다가간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두렵지만. 불꽃이 다시 자신을 잡아 벗어나기 어렵지만, 그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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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사용하는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 – 여름’이라는 곡이다. 영화적인 배경은 가을 - 겨울쯤의 날씨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쌀쌀한 날씨 속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함께하지 못한 시간 그 시간은 바로, 여름이라는 시간이었다. 결국 영화의 엔딩 각자 서로의 위치에서 사계의 악장을 들으러 간 그들은 노래를 들으며 서로를 기억하게 된다. 엘로이즈는 화가의 말을 떠올리면서 서로의 기억 속에서 여름의 이야기를 더한다. 그렇게 사계를 함께한 여인으로 남기고자 한다.

 

또한 그들은 서로의 만남을 기억한다. 서로는 서로의 이야기를 알고 있고, 그들의 만남은 굴곡이 있었다. 여인의 표정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시작되어 웃다가 다시 눈물을 흘린다. 그들의 만남의 과정이었다. 그저 무관심했다가 그녀에게 다가가고 서로 웃어준다. 그리고 결국 이별 앞에서 울고 만다. 음악은 그들의 사이를 그들의 기억을 다시 기억하게 한다.

 


 

오르페우스


 

영화의 전반을 채우는 오르페우스 서사.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시인이자 악사이다. 그리고 그를 ‘음악의 아버지’라고도 칭한다. 영화에서 바로 ‘오르페우스’ 스토리를 가지고 온다. 그것도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이를 보면서 오르페우스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 아닌 직접 그 소설의 구절을 읽는다. 그리고 두 사람 의견이 갈린다. 왜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와야 했는가. 소피는 아니다 이해가 된다고 말이다. 그 가운데에서 마리안느는 두 사람 의견이 모두 맞다고 한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뒤를 돌아봤고, 너무 사랑하기에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됐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는 사랑이 아닌 결국 뒤를 돌아보는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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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을 보여준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결국 뒤돌아봐야 했던 그 순간. 역설적이게도 뒤를 돌아봤기에 너무나도 오르페우스가 자신의 여인을 엄청나게 사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엘로이즈는 오르페우스였고, 마리안느는 에우리디케였다. 그렇기에 그 순간 뒷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어쩌면 그 이별의 순간을 자신이 그림으로 남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르페우스 이야기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추억으로서 머물게 된다. 엘로이즈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 뒤 돌아본 것으로 서로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둘의 만남은 계속해서 뒤따라가는 화가와 앞질러 가던 엘로이즈이기에 가능했다. (영화의 중간 매번 앞으로 가서 얼굴을 보기 어렵다는 말한다.) 결국 그 뒤를 돌아보았다. 주인공은 그 그림을 완성하지 않음으로 결혼을 다시 미룰 수 있었다. 아니면 현실에서 외면해서 자신들의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들은 그저 자신의 기회 속에서만 이야기하자고 한다. 결국 음악이 흐르고, 마리안느가 그린 그림들은 그 오르페우스의 죽음이 서글픔이 아닌 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란 것을 인정하게 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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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워지고 싶다.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그런 본 모습을 사랑해주는 이와 사랑하고 싶다. 그렇게 해야 나는 자유로워진다. 칸 영화에서 각본상을 거둔 이 작품은 아카데미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자유로움을 향해 나아가고, 완전한 평등을 모토로 하는 미국 사회에서. 진정한 평등과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는 영화라는 장르 속에서 생각했었다. 남성들이 전반이 영화판에서 여성 감독, 여성 배우, 여성의 사랑, 여성의 독립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그저 존재만으로 반가울 뿐이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자신의 지조를 버리지 않고, 자신의 지조를 지키면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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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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