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성장이라는 판타지 - 벌새, 2019 [영화]

글 입력 2020.03.07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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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House of Hummingbird, 2019


감독 : 김보라

배우 : 박지후, 김새벽

 

1994년, 공부하는 것보다는 노는 게 더 즐거운 평범한 14살 은희. 폭력적인 오빠와 그것을 묵인하는 부모님, 자신을 일탈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언니로 인해 은희는 속상한 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은희는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한문 선생님 ‘영지’를 만나 호감을 느낀다. 은희를 위로해 주는 영지의 따스한 말에 그녀는 희망을 품게 되는데. 한편 은희의 귀밑에 작은 혹이 생길 무렵,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다.


***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소녀는 무너진 다리를 바라본다. 며칠 전 무너진 바로 그 다리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죽거나 다쳤다. 어스름한 새벽녘, 조금 있으면 해가 떠오른다.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들을 어렴풋이 느끼며 그녀는 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다리 건너 저 편으로. 다리가 무너지기 이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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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헤어지자.” 그녀와 헤어졌다. 꼬박 나흘 만에 만난 그날에, 함께 마라탕을 먹으러 간 그 자리에서. 정돈된 글자로 전달한 그녀의 이별 선언에는 여지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나는 비틀거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만난 지 1400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나는 아주 긴 터널 속을 헤맸다. 이별이 남긴 파장은 나를 훌쩍 과거로 데려다 놓았다. 나는 내가 저질렀는지도 몰랐을 잘못들을 끊임없이 복기한다. 만약 그때 내가 그랬다면, 혹은 그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게임 Last day of June은 그런 판타지를 건드린다. 주인공 ‘칼’은 과거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아내 ‘준’을 잃고, 하반신 불구가 된 남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내가 남긴 그림을 통해서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힘을 이용해 아내를 되살리고자 노력한다. 흥미로운 건 이 게임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방식이다. 기적은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다. 죽은 이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 부활시켜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의 기적은 주인공이 직접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대관절 왜?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굳이 번거롭게? 어쩌면 그건 우리가 어떤 기적을 소망할 때 습관적으로 뒤를 돌아보기 때문이 아닐까. ‘떠나간 이들이 다시 이 자리에 나타났으면’이 아니라 ‘만약 그 배를 타지 않았더라면’, ‘지하철이 아니라 버스를 탔다면’, ‘조금만 늦게 다리를 건넜더라면.’


그러나 현실에는 시간을 돌이킬 수 있는 기적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의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이웃 사람들이 되어 그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저질렀던 사고의 원인들을 제거하면서 해피엔딩에 차근차근 다가간다. 하지만 그 끝에서 주인공이 마주하는 건 어떤 식으로든 사고는 반드시 일어났을 것이라는 운명이다. 우울한 결말을 맞이한 플레이어에게 게임은 조용히 알림을 띄운다.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요.’ 맞는 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같은 게 그렇다. 판타지 속에서도 불가능했던 일이 현실에서 가능할 리가 없다. 그들의 죽음은 결코 무효화되지 않으며, 우린 그저 남은 하루를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플로베르의 말마따나 샴쌍둥이처럼 죽은 이의 존재를 평생 등에 업고 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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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에게 1994년은 그런 해였다. 삐걱거리긴 해도 든든하던 그녀의 작은 세계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던 그때. 남자친구와는 소원해지고, 자신을 우상처럼 여기던 후배는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모른 척한다. 하나뿐인 단짝 친구는 혼나는 게 두려워 그녀를 배신했고, 그녀의 가족은 작은 혹이 났던 그녀의 귀를 기어코 고막이 찢어진 귀로 만들어버렸다. 망가져버린 관계들 속에서 상처받은 은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새로 온 한문 선생님 ‘영지’뿐이다. 하지만 영지조차도 어느 날 갑자기 훌쩍 은희의 곁을 떠나버렸다.

 

<벌새>의 오프닝은 남의 집을 자신의 집으로 착각하여 문을 두드리는 은희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를 엄마가 자신을 외면한 것이라고 생각한 은희는 문을 더욱더 세게 두드리며 애처롭게 소리친다. 이후 여기가 자기 집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은희는 밀려드는 민망함을 곱씹으며 다시 자신이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1994년 그 해, 그녀에게 닥친 일들이 그러한 종류였다면, 그녀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었다면 은희가 스스로 고쳐서 바로잡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 해, 은희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갑자기 자신을 멀리하는 후배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후배는 은희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다. 그건 불가항력적인 일이니까. 영화 속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도 마찬가지다. 사고의 피해자들은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게 아니다. 그리고 은희의 관계도 그녀가 꼭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틀어진 게 아니다. 다만 그런 일들이 종종 느닷없이 우리의 삶에 틈입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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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무너졌다. 그런데 왜 하필 다리여야 했을까. 건물도 있고 도로도 있을 텐데 왜 꼭 성수대교여야 했을까. ‘다리’는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일종의 통로다. 다리가 끊어진다는 건 다시는 그곳으로 갈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극 중에서 은희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의 피해자가 될 뻔했던 언니와 함께 새벽녘에 무너진 다리를 보러 간다. 연락이 닿지 않던 그녀의 언니와 그날 저녁을 함께 먹으며 은희는 안도를 했더랬다. 그 사고에서 그녀가 사랑했던 또 다른 누군가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모른 채. 그러니까 은희가 그날 본 건 단지 무너진 다리만이 아니었다. 그건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떠나버린 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다. 이제 그녀는 1994년, 열네 살이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없다.

  

이별과 망가진 관계는 상처를 남긴다. 그것도 아주 흉한 상처다. 마치 무너진 다리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칼’의 다리처럼. 어쩌면 성장한다는 건 그러한 상처들을 하나씩 늘려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쓰라린 과정을 우리는 ‘성장통’이라는 예쁜 말로 포장하나 보다.

  

하지만 그건 그냥 말이 주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성장이라는 판타지. 1995년이 되었다고 해서 은희가 조금 더 성숙한 아이가 되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녀는 소원해진 관계와 사람들로부터 (심지어 그녀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처받을 것이다. 또다시 다가온 상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성장의 진짜 본질은 ‘불가항력’이다. 우리는 다리가 무너져 버렸으니까 돌아보지 않는 방법을 배운다. 이미 망가져 버렸기에 망가진 관계를 안고 견디는 방법을 배운다. 그렇게 우린 떠밀리듯이 살아간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김광석, 서른즈음에


 

[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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