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가 갠 하늘 [사람]

얼떨결에 스물 세살에 세상에게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선물을 받아버렸다.
글 입력 2020.02.2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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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 않은 사람치고 너무 많은 약을 먹었다. 그래서 슬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종 옛날 생각을 한다. 그러고 나면 감기에 걸린다. 다 멸망한 일인데 잊으면 끝날 일인데 잊음에 실패한다. 어른이 되기 싫어. 하지만 어른이기 때문에 잊음에 실패한다. 상실했기 때문에 부정하는 것이다. 멸망한 세계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른의 족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날개를 잃었다. 쫓겨났다.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은 아파하는 일이다. 스스로에게 저주를 내리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미워했다. 약을 토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그만 자유롭게 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슬픈 방법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 세계의 완전한 멸망의 때를 기다린다.


그는 그렇게 쓰고 일어났다. 고양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인간은 과거에 슬퍼하는 것일까? 고양이의 삶은 길거리의 음악과 같다. 흐르지만 붙잡을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노래를 듣고 또 듣는다. 그 음악이 자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힌 인간.


고양이는 카페 한 켠에 비친 햇빛을 받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붙잡을 수 없는 꿈에 빠진다. 약을 먹은 인간도 집에 돌아가면 침대에 누워 울다가 잠에 들 것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또 들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슬플 운명이다.



얼마 전 이렇게 어떤 소설의 한 부분을 떼어낸 듯한, 조각글을 쓰고 막막해 했다. 내가 잃어버린 나는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내가 잃어버린 그 나는 누구일까. 그것을 잃어버림으로써 얼마나 모질어졌을까.

 

아주 오랫동안 막막해하던 문제였다. 내가 못나게 된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사람과 이별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졸린 약을 먹으려고 병원에 찾아갔기 때문이야. 병원에 감으로써 내 감정을 비정상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야. 벼랑에서 뛰어내려서 하늘에 닿으려고 하는 것을 포기한 채 차근차근 삶을 쌓아올리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내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노력해도 과거는 바꿀 수 없었다. 나는 바뀐 나를 차근히 바라본다. 아무리 봐도 별로였다. 내가 생각하던 나만의 보물, 나만의 능력은 어떤 행동의 벌로 인해서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 거라고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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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살 생일에는 비가 왔다. 우산을 쓰고 식물원에 갔다. 비는 가는 길에 그쳤다. 그리고 몽실몽실한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지하철 창문 밖에 가득했다.


오랜만에 정말 넓은 하늘을 봤다. 내가 간 그 곳은 이제 막 개발하기 시작하는 듯한 곳이어서 다른 서울 지역에 비해 건물이 적었고 하늘은 넓었다. 고등학교 때, 이전 대학교 때 매일 보던 하늘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은 내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행복해 보인다고 했다. 정말이지 모든 세상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비가 내려 생긴 물웅덩이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 멋져서 그걸 옆에 있던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자 내가 고등학교 시절 매일 듣던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내 감수성이 대단하다고 했다. 그 때 알았다. 나는 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하늘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학창 시절 나의 '감수성'이라는 측면에 늘 집중해왔다.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을 다르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늘 겉돌았고 특이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을 동경하기도 하고 경멸하기도 했다. '감수성'과 '보통'이라는 단어는 내게 애증을 주는 단어였다.


그러다가 감수성을 잃어버리자 나는 그토록 동경하면서 동시에 경멸하던 보통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내가 살던 감수성의 세계에서 쫓겨난 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갔다. 그렇게 살아가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 순간 나는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이리저리 찾아다니게 되면서 알록달록해진 것이다.

 

생일이 되기 얼마 전에 동기모꼬지에 갔다. 거기서 한 친구가 사과를 들고 왔다. 그 사과를 들고 있는 사람은 등을 돌려 앉아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궁금했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얘들 모두 번갈아가면서 그 게임을 했다. 사과가 손때를 타서 반짝반짝했다. 나는 그 사과를 들고 등을 돌려 앉아 내가 어떤 사람같냐는 질문을 얘들에게 던졌다. 얘들은 내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같다고 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법을 아는 사람 같다고 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을 만나 안정되어 보인다고 했다. 나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내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한 번도 수식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되는 형용사였다.

 

이전의 나는 감수성을 가진 오만한 사람이었다. 우월했고 늘 위태로웠다. 그리고 그게 좋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 꼭 껴안았을 때 포근한 사람이 되었다. 이전에 고등학교에서 참을 수 없이 외로울 때 껴안았던 친구의 몸과 비슷해졌다. 그 친구는 나를 안아주면서 뾰족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이제는 내가 말해줄 때다.

 

그리고 스물 세살 생일에 나는 감수성이 있으면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인생에 오래오래 내리던 비가 개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 날 좋아하던 사람들은 내 뾰족하고 오만한, 내 일부를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렇게 살아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를 사랑하던 하늘을 잃어버리자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이리저리 찾아다녔고, 나는 알록달록해졌다. 지금 내 옆에 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알록달록해져서, 그래서 더 행복해보여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게 좋았다. 그냥 좋았다.


얼떨결에 스물 세살에 세상에게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선물을 받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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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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