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폭력] 14. 마법에 걸린 그날의 우리②

우리는 언제나 피 흘려왔다
글 입력 2020.02.1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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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나의 사적인 폭력’ 열세 번째 이야기를 쓰면서 영화 <피의 연대기>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 공부를 위해서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을 본 것과 같은 몹시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었다. 생리에 관한 작품은 <피의 연대기>가 유일하니 말이다.

 

카페에서 글을 쓰면서 세운 계획은 이러했다. ‘카페에서 대부분의 글을 작성하고 집에서 영화를 관람한 뒤 조금 살을 붙여 업로드 해야겠다.’ 영화에 관해선 적당히 몇 줄만 더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관람이 길어질수록 나의 간단한 계획이 점점 틀어지기 시작했다. 영화가 제시하는 생리 담론이 몇 줄 더하고 말 만큼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조금 전까지 생리에 관한 글을 썼던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달았기에 더욱 더 원래 계획을 이행할 수가 없었다.

 

저번 글을 게시하고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지금 ‘또’ 생리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쉴 새 없이 전혀 다른 주제의 콘텐츠가 올라오는 시대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이미 끝난 얘기를 다시 하는 걸까? 누군가에겐 끝난 얘기일지 몰라도 나에겐 현재진행형의 얘기다. 그 한 달 사이에도 생리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매달 피를 흘렸다. 이 지긋지긋한 반복은 내 신체가 건강하다면 향후 몇십 년은 지속할 것이다. 과거에도 피 흘렸고 지금 피 흘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피 흘릴 여자들, 우리, 나. 저번 글에서 생리에 관한 사회의 인식을 다뤘다면 이번 글에선 이런 화두를 던질 것이다. 우리 여자들은 언제나 흐르는 피를 어떻게 감당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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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단연 생리대다. 우리 집은 여자 형제가 유독 많아서 생리대를 박스째로 대량 구매하며 사용했다. 내가 처음 생리했을 때 집에는 나보다 먼저 시작한 언니들이 여러 명 있었다. 피를 보고 놀란 마음을 진정하기도 전에 엄마가 내민 건 집에 있던 생리대였다. 오랜만에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때 나에게 브랜드를 선택할 여지마저도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 씁쓸하게 다가온다.

 

물론 그땐 아무 생각도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씁쓸하기는커녕 생리대라는 생활필수품이 집에 상주해 있다는 게 편하기만 했다. 집을 떠나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본가에서 엄마가 보내주는 택배에 생리대가 빠진 적은 없었다. 있는 대로 쓰는 것, 주는 대로 받는 것. 내게 생리대란 그런 존재였다.

 

그랬던 나에게 2017년 일어난 ‘생리대 파동’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생리대 브랜드에 따라 생리 양이 줄고, 고통이 극심해지는 부작용이 수반되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여성환경연대로부터 생리대에서 유해 물질이 검출되었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되었다.

 

해당 브랜드는 제품에서 검출된 물질이 신체에 유해한 수준이 아니라는 공식 입장과 함께 각종 시험 증명서를 보이며 해명했다. 유해 물질의 검출 자체를 의심하는 시선도 많았다. 여성환경연대가 과연 믿을 만한 기관이냐는 것이다. 거기에 식약처의 입장도 수시로 바뀌어 혼란은 더해졌다.

 

여러 갑론을박이 오가는 동안 내가 한 거라곤 아무것도 모른 채 공포에 떠는 것뿐이었다. 어떤 제품에서 유해 물질이 검출되고 소비자가 등을 돌리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제품이 생리대라면 말은 달라진다. 가장 민감한 부위에 직접적으로 닿는 제품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됐다니. 불안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내게 조사결과가 확실한 것도 아니니 침착하라고 했다. ‘생리대’와 ‘발암물질’이 같은 문장에 쓰이는 자체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은 정말 침착했다. 일 년 뒤 2018년, 한 업체의 생리대에서 라돈이 검출되었을 때도 같았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업체는 반박하고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고 시간이 지나자 잠잠해졌다.

 

생리대에 검출된 유해물질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생리대 파동’은 내게 많은 진실을 알려주었다. 생리대가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세상은 여성의 생리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것.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매달 나를 도와줬던 생리대가 두려워졌다. 그 와중에도 내 몸의 빨간 피는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불안해도 생리대에 손을 뻗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야속했다. 파동이 한창 진행되던 중 사람들은 대안으로 외국산 생리대를 찾았다. 그 말에 따라 매장에 갔는데 품절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 다른 대안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생리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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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미국 드라마를 본 적이 있어서 탐폰 정도는 알았다. 생리컵은 난생처음으로 들어본 단어였다. 생리컵이란 의료용 실리콘 등으로 만들어진 종 모양의 생리용품으로 여성의 질 내부에 넣어 생리혈을 받아낸다. 일회용인 생리대와 달리 세척해서 쓸 수 있고 사용할 때도 훨씬 깔끔하고 편하다는 게 사용자들의 후기였다.

 

<피의 연대기>에서도 생리컵에 대한 많은 내용이 나온다. 생리컵을 사용하는 방법, 생리컵의 원리, 생리컵을 세척하는 모습까지 말이다. 생리컵의 획기적인 면보다 더 놀라웠던 건 수많은 생리를 겪어왔으면서 여태 생리대 말고는 다른 용품을 몰랐다는 점이었다.

 

영화에선 생리대가 당연하지 않은 사람도 나온다. 탐폰과 생리컵이 익숙한 서양의 여성들이 그랬고, 감독 김보람의 할머니가 그랬다.

 

오래전에도 여성은 매달 피를 흘렸다. 그 오래전에 생리대란 없었다. 따로 놓았을 땐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졌던 진실은 같이 놓이자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감독 김보람의 할머니 여경주가 아무렇지 않게 전하는 목화를 무명베에 짜서 생리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마땅한 생리용품이 없는 여성은 현대 사회에서도 있었다. 저소득층의 아이들이었다. 2016년 신발 깔창을 생리대로 대신했다는 아이의 이야기가 사회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저소득층 아이에게 생리대가 지원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처음으로 심어지는 계기였다. 모든 여성이 생리를 하며 생리대는 일회용이다. 내가 살면서 사용한 생리대가 몇 개인지 감히 셀 수도 없다. 게다가 생리대는 저렴하지도 않다. 한 장당 331원으로 OECD 국가 중 제일 높다. 나도 집에서 항상 대량 구매해왔기에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지 혼자서 그 많은 양의 생리대를 구매했다면 몹시 부담스러워했을 것이다.

 

저소득층 생리대 정책에 대한 담론 역시 영화에 등장한다. 영화는 생리대 지원을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반발에 부딪힌 한국 여성들의 인터뷰 다음에 생리대와 탐폰 무상 공급 법안이 통과된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생리 문제를 대처하는 사회의 모습에 여러 갈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 <야한 영화의 정치학>에서 <피의 연대기>와 관련하여 인상적인 말이 나온다.

 

 

즉 <피의 연대기>가 공유하는 여성들의 인터뷰들과 각 나라, 혹은 기관에서 진행되는 생리 관련 법안 및 정책은 ‘생리’라는 행위가 더 이상 화장실에 종속되어야 하는 은밀한 행위가 아닌, 사회적 자장 안에서 지지되고 관련한 권리를 존중해야 하는 아젠다임을 제시한다.

 

영화가 이루어내는 가장 큰 성취는 여성들이 생리에 관하여 얼마나 많은 선택들로부터 배제되어 왔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P.233-234


 

우리는 언제나 피 흘려왔고, 그것을 감당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여성들은 그 일을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만 여겼다. 생리는 한 개인의 일도, 화장실 안에서 몰래 해결해야 하는 일도 아니다. 세상 모든 여성의 공통적인 고충이며 그 고충은 사회가 나눠 갖는 게 당연하다.

 

다행히 우리 사회가 생리에 대해서 무관심으로만 일관한 것은 아니다. <피의 연대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2017년 11월 24일, 한국의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청소년복지 지원법 개정안을 의결한다'는 문구와 '이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여성청소년에게 생리대 등 보건위생에 필수적인 물품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다'라는 문구가 화면 중앙에 떠오른다.

 

아직 만족스럽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이 내게 큰 위안을 준다.

 

생리는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생리에 관한 논의에서 주인이 되어야 할 것도 나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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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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