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라면 봉지부터 지하철역까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미술 [시각예술]

알게 모르게 우리들이 일상 속에서 지나쳤던 미술에 대해
글 입력 2019.12.3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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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곳에서 마주친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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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명동 신세계백화점 공사 현장의 가림막에 사용된 마그리트의 <골콩드(겨울비)>

 

 

많은 이들은 이 그림이 2005년 명동에서 한동안 내걸려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 작품은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 <골콩드(겨울비)>로, 명동 신세계백화점 리모델링 공사 현장을 가리기 위한 외벽으로 사용되어 공사가 끝날 때까지 도심을 장식하였다. 미관상 좋지 못한 가림막을 유명 작가의 작품으로 탈바꿈시키며 소음과 먼지가 가득한 공사현장의 부정적인 인식을 전환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신세계백화점 측이 1년 저작권료로 1억을 지불했다는 것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과한 지출이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 사업을 통해 마그리트의 작품이 빠른 시간 안에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예술을 마주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곳, 이를테면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아닌 도심 속 한복판이나 일상 속 사물에서 마주하게 되는 미술은 우리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큰 영향력을 끼친다. ‘골콩드’로 장식된 이 가림막 이외에도 우리가 일상 속에서 알게 모르게 지나친 미술은 무엇이 있을지, 최근 알게 된 사례들을 소개해 보겠다.

 

 

 

미술 교과서 속 그림을 라면 봉지에서 만나다 - 진라면 X 호안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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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진라면의 봉지에 그려진 이 그림들은 무엇일까? 바로 호안 미로의 작품들이다. 우리 가족은 진라면을 즐겨 먹은 지 꽤나 오래되었는데, 그럼에도 이것을 알게 된 것은 겨우 일주일 전이다.


지난주에 라면 물이 끓기까지 기다리는 게 지루해 라면 봉지를 꼼꼼히 살펴보던 중, 봉지에 쓰인 문구를 보고 알게 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이 사업은 2018년에 진라면 출시 30주년을 기념하며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호안 미로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로,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등에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자적 양식을 개발하였다. 상형문자처럼 추상화된 특유의 이미지들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들 속에서 꿈처럼 부유하는 형상과 선명한 색감은 풍부한 상상력과 생기를 표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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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안 미로의 The Morning Star

 

 

그리고 오뚜기는 이러한 미로 특유의 밝은 에너지를 진라면과 결합시켜 생기 넘치는 이미지를 꾀함과 동시에 거장 화가의 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해 진라면의 대외적 이미지 또한 고급화하려 했다. 그러나 진라면과 호안 미로 사이의 명확한 교집합을 찾기 어려워 효과적으로 시너지를 발휘하기 어려웠을 듯싶기도 했다.

 

 

 

2000년대 가전제품 디자인의 대명사 - 하상림 X LG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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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이 냉장고 역시 아트 콜라보레이션으로 완성된 디자인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추억처럼 느껴지는 이 꽃무늬는 냉장고뿐만 아니라 세탁기, 에어컨 등 수많은 가전의 표면을 장식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당장 우리 집만 해도 이 무늬로 장식된 빨간 에어컨이 벌써 10년째 거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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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상림 작가의 P-0601



2006년 LG전자는 그의 꽃 그림을 적용해 '아트 플라워' 가전을 선보였는데, 이 꽃무늬의 주인공은 하상림 작가였다. 그는 ‘꽃의 화가’로 불리며 꾸준히 꽃의 생명성에 집중해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그는 단순하고 절제된 색감과 선으로 꽃의 자연적 형태를 표현한다. 꽃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매력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그의 작품 속 꽃의 형상은 미술과 디자인의 접점에서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하철 노선과 이동객, 미술을 하나로 - 강은혜 X 성신여대입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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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소개할 사례는 말 그대로 일상 속에서 알게 모르게 마주할 수 있는 미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거나 식사를 하기 위해 성신여대입구역을 자주 들르는데, 그때마다 지나치는 환승 엘리베이터 구간은 강은혜 작가의 <커넥션 Connection>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우이신설 미술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코리아나미술관의 기획과 강은혜 작가의 참여를 통해 환승 에스컬레이터 구간 전체는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작가 측은 작품 속의 선들로 지하철 노선이 서로 교차하는 모습과 열차의 속도감을 시각화하였으며 전면에 설치된 거울을 통해 감상자들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인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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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은혜 작가의 Gestalt(게쉬탈트)

 

 

강은혜 작가는 본래 직선이라는 조형요소에 집중하며 다양한 장소특정적 설치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의 작업은 주로 3차원 공간을 가로지르는 나란한 면사의 집합들로 이루어지는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작품에 비해 감상자가 작품이 자리하고 있는 공간을 자유롭게 누비며 작품과 만날 수 있으며 그들의 참여와 체험을 유도한다. 이러한 특성은 유동 인구로 가득 찬 지하철역의 환승 통로에서 이를 데 없이 적합하다.

 

 

 

지하철역 전체를 하나의 미술관으로 - 녹사평역 지하예술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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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하철역 속 일부 공간을 미술작품으로 바꿔낸 성신여대입구역과는 달리 녹사평역은 역 전체가 하나의 미술관이다. 녹사평역은 지하철역답지 않은 밝은 채광과 높은 돔, 좌우대칭의 높은 에스컬레이터 등 독특하고 화려한 구조가 인상적인 곳으로 ‘녹사평역 지하예술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녹사평역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난 2019년 3월에 개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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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승희 작가의 <녹사평 여기...>



2000년도에 서울시는 서울시청 이전 계획과 함께 이전 지역 인근의 녹사평역을 큰 규모로 지었으나, 이전 계획이 무산되면서 이곳은 유휴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쓰임새와 개성을 찾지 못했던 녹사평역은 ‘푸른 풀이 무성한 들판’이라는 뜻에 걸맞게 자연과 미술, 인간을 연결 짓는 예술 공간으로 역할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유리 나루세와 준 이노쿠마 작가, 조원진 작가, 조승희 작가의 다채로운 설치 작업이 선보여졌으며 다양한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된 '지하예술정원 축제' 또한 개최된 바 있다.

 

*
 

이렇게 살펴본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미술은 어느 곳에서나, 어떤 방법으로나 우리의 일상과 어우러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미술에는 특정한 목적성이 부여되며 미술이 또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이용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해 준다. 그러나 그렇게 적용된 미술이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필수적이다.


문화예술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는 가운데 미술을 여러 영역으로 끌어들여 해석하려는 시도는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 그 시도가 피로감을 불러오지 않기 위해서는 미술을 어느 곳에나 마음껏 대입할 수 있는 만능열쇠처럼 대하기보다는 그 의미가 제 목적에 부합하는지, 혹은 그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에 대한 숙고의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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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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