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극이 목격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방식

사회적 참사를 다룬 연극 <7번국도>
글 입력 2019.06.22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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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 삶에 머무는 일이 곧 예술이 되어버린 시대에, 연극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20세기, 대부분의 연극은 유희적 예술로서 극에 대한 높은 몰입도를 추구했다.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와 극적인 전개로 무대 위 사건이 현실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었다. 당시 독일의 극작가였던 브레히트는 이러한 연극의 ‘극적 환상(theatrical illusion)’에 문제를 제기했다. 감정이입을 유발하는 표현 방식이 관객들의 독립적인 사고를 막아 극장 바깥의 일들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브레히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사극’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다. 보통의 '극적' 연극이 사건을 겪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주인공의 주관적 서사를 풀어나갔다면 브레히트의 '서사적' 연극은 사건의 목격자 자리에서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당사자가 아닌 목격자의 위치에서, 연극은 단지 그 사건을 "재현하고 있을 뿐"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결과적으로 목격자의 진술을 듣는 다른 사회 구성원들, 다시 말해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들은 극에 몰입하는 대신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 사건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게 된다.
 
연극 <7번국도>는 정확히 사건의 목격자 자리에 서서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 연극은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건과 군 의문사 사건을 다룬다. 우리 사회의 비극적 참사를 다루었지만 연극은 극적인 서사와 거리가 멀다. 극을 구성하는 4개의 장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단절되어 뒤섞여 있고, 극적 사건은 장과 장 사이에 발생한다. 따라서 관객은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사건에 대해 알게 될 뿐이다.

배우들은 허공을 바라보고 서서 큰 소리로 대사를 내뱉는데, 이러한 발화 방식은 배우와 인물 사이, 인물과 인물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든다. 무대 위 일렬로 배치된 부품 조각들, 인물들을 비추는 직선의 조명 또한 이곳이 극장임을 상기시킨다. 이로써 관객들은 무대에 완전히 몰입하는 대신에 거리를 두고 사유의 공간을 갖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7번국도>의 관객들은 연극일 뿐인 이 이야기가 우리 사회의 중대한 현실과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연극 속 몇몇 대사는 유사한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데, 비극적 사건을 공유한 관객들은 같은 대사를 듣고도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낀다.

극 초반에 웃음을 자아냈던 농담조의 대사가 후반부에 반복되었을 때, 관객들은 그 누구도 웃지 못한다. 말의 무게가 달라지는 연극적 경험을 통해 관객은 더 이상 사건의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뒤틀리고 상식적이지 않은 세계의 내부자로서 함께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예술은 왜 현재진행형인 사회적 참사를 무대에 올리는가? 목격자는 왜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가? 이는 당연하게도 연극이 목격자로서의 책임을 져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극장 밖 많은 문제들이 경각에 달려 있음에도 정작 현실의 언어로는 그 무엇도 모색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연극은 함께 바라보고자 하고, 이에 대해 사유하고자 하고, 그로써 변화하고자 한다.
 
 
참고 도서: 베르톨트 브레히트, 송윤엽 외 역, 『브레히트의 연극이론』


[김주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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