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섬세하고 날카롭게 풀어내는 여성들의 이야기 – 내게 무해한 사람 [도서]

글 입력 2019.06.16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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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었지만 최은영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었다.


소설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는 특유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감성 때문에 감상을 글로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덕분에 첫 문단을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


그래도 한 마디로 힘겹게 가다듬어 보자면, <내게 무해한 사람>은 시리면서 뜨거운 울음을 삼키며 상처를 반추하는 쓰라림과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느리게 나아가는 발걸음을 응시하면서 느끼는 묘한 위로를 동시에 주는 책이다.




601,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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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어느 오전, 나는 엄마랑 싸우다 펑펑 울었다. 발단은 사소했다. 무심히 뉴스 기사를 보다 여성혐오 범죄 소식을 접한 엄마는 내게 “너도 조심해. 밤에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별안간 울컥한 나는 “엄마는 왜 나한테 조심하라고 그래? 남자한테 사람 죽이지 말라고 해야지, 왜 나한테만 조심하라고 그래. 내가 뭘 잘못하면서 사는데 나한테 그래. 그 여자는 조심 안 해서 죽었어? 그 여자가 밤에 밖에 나간 게 잘못이야? 왜 그렇게 남 일처럼, 왜 엄마는 그렇게 말해?”라고 쏘아붙였다.


갑작스레 얼굴을 붉히며 받아 치는 나를 보고 당황한 엄마는 “내가 괜히 그렇게 말해? 네가 걱정되니까 그러지. 엄마가 그럼 딸이 걱정된다는 말도 못해? 내가 그럼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니?”라고 하며 울먹였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한참을 서로에게 언성 높여가며 말다툼을 했고, 이 싸움은 잠에서 깬 동생이 당황한 얼굴로 거실로 나오고 내가 눈물을 터뜨리며 방으로 들어가버리면서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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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조심해. 밤에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이 말의 도대체 어느 부분이 나를 그렇게나 화나게 했는지 아직도 조금은 의문이다. 하지만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마가 잘못됐다고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아서, 그래서 모질게 뱉어 지는 내 말에 스스로 상처 입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쓸쓸했고, 어디에도 풀 수 없는 분노를 엄마에게 쏟아냈다는 죄책감에 괴로웠다.



“오늘 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 말을 하는 엄마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넌 여자애야.”


p. 76



단편 「601, 602」는 어린 시절 같은 아파트에 살던 ‘주영’과 ‘효진’의 이야기이다. ‘효진’은 일 년에 열두 번 제사를 지내는 집에서 오빠 ‘기준’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한다. 화자 ‘주영’은 친구 ‘효진’에게 쏟아지는 무자비한 폭력을 멈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부림을 치지만, 이 또한 결국 ‘주영’을 향한 단죄로 돌아올 뿐이다. 그리고 ‘주영’의 엄마는 ‘주영’에게 “넌 여자애야.”라고 못박는다.

여성의 생물학적인 한계를 인식시키며 여성에게 쏟아지는 비인간적인 폭력을 묵인하게 하는 입막음은 같은 여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엄마의 비수 같은 한 마디에 ‘주영’은 ‘외로움이 서린 분노’를 느낀다. 이 ‘외로움이 서린 분노’는 시간이 지나며 ‘효진’의 삶과 자신의 삶을 분리하고 타자화함으로써 서서히 수그러든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서 자신에게도 남동생이 생겼으니 이제 행복해질 것이라고 적는 ‘주영’의 편지를 읽으면 가슴 한 켠이 꽉 막히는 듯한 불편함을 떨쳐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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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여자애야. 그러니 조심해. 일찍 다니고. 짧은 치마 입지 말고.”

한국에서 한 번도 이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여성이 과연 존재할까? 만약 있다하더라도 저 몇 마디에 따라붙는 불안과 죄책감, 공포까지 느껴본 적 없는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새로울 것 없는 흔한 잔소리에 반발심이 울컥 쳐들지만 나를 향한 엄마의 걱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끝내 누그러지고 마는 ‘외로움 서린 분노’는 그래서 더 날카롭고 복잡하다.


*


우리가 서로의 손을 놓친 채 멀어지게 되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렇게 놓친 손을 다시 잡기는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같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안아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읽고 두서없이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을 정돈하는 것이 오늘따라 유난히 어렵게 느껴진다. 「601, 602」는 특히 뜨겁게 끓어오르면서도 서늘한 감정을 밀도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내게 무해한 사람> 속 일곱 단편 중에서 유독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내가 「601, 602」를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연대를 위한 노력이 같은 여성에 의해 외면 받는 순간은 어떤 억압보다도 더 깊은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런 다난한 상처 속에서 맞잡은 손일수록 더욱 강한 힘으로 서로를 붙잡아주고 어루만져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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