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의 우울은 지구 종말보다 무겁다 [시각예술]

글 입력 2017.01.1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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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 - 멜랑콜리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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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감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우울증은, 한 사람의 삶을 잠식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심한 우울감에 시달리는 이들은 먹는 일과 씻는 것 마저도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우울이라는 존재가 욕조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쪽 발을 들어올리는 것 마저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울에 관한 영화가 한 편 있다. 우리에게는 <님포매니악> 으로 더 유명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이다. 이 영화는 포스터부터 강렬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물 위에 누워 있는,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는 커스틴 던스트를 바라보며 우리는 명화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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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hn Everett Millais의 'Ophilia'라는 작품이다. 그림 속 오필리아는 너무나 슬픈 소식을 들은 나머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하다. 그녀는 그녀의 눈 앞에 놓인 자신의 '죽음'보다도 자신을 슬프게 한 어떤 '사실'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필리아에게 죽음이란 아무런 타격을 입히지 못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꽃들이 더욱 애처롭게 보이는 이유 또한 그것이다. 슬픔에 잠식 당한 그녀의 곁을 지키는 꽃이 아름다운 빛깔을 하고 있기에 더욱 처연하다. 멜랑콜리아의 포스터 속 저스틴(커스틴 던스트 役) 또한 오필리아와 닮은 점이 많다. 
  
  유능한 카피라이터인 저스틴이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리무진이 좁은 길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남편과 다정하게 눈을 맞추며 웃음을 터뜨린다. 이 대목까지만 해도 관객들은 그녀가 단순히 결혼을 앞두고 즐거워하는 여자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저스틴이 결혼식장에 늦게 도착하게 되고, 이 결혼식에 든 비용이 얼만지를 생각하라고 쏘아 붙이는 그녀의 언니 클레어(샬롯 갱스부르 役)가 등장하자 이 가족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사람들이 서로 웃고 춤을 추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저스틴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억지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방으로 올라가 무기력하게 잠들어버린다. 심지어는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로 앉아있기도 한다. 

  저스틴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으며, 그녀의 언니는 결혼식 하루만이라도 저스틴의 우울이 발산되지 않기를 바라는 인물이다. 하지만 저스틴은 언니의 기대와는 달리 결혼식을 비극으로 만들어 버리고, 결국 약혼자마저도 그녀를 떠난다. 그러나 저스틴은 이러한 결말을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한다.

"이럴 줄 알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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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스틴의 결혼식에 관한 에피소드로 1부가 끝나고, 이어지는 2부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바로 '지구 종말'이다. 별을 관측하는 남편을 둔 저스틴의 언니 클레어는 '멜랑콜리아'라는 별이 지구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미래를 그 누구보다 두려워한다. 그녀는 멸망의 순간이 오기 전 자살을 하기 위한 약들을 서랍장에 숨겨두기도 하고, 지구로 가까워 오는 행성의 크기가 어제보다 커졌는지를 강박적으로 확인한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극한의 두려움을 느끼며 울음을 터뜨리는 클레어를 저스틴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오히려 클레어의 아들에게 멸망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동굴을 만들자며 나뭇가지를 줍기 위해 숲으로 향한다. 가족들이 다 함께 밖에 모여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클레어의 말에 '화장실은 어때?'라고 되묻기도 한다. 이를 통해 지구의 마지막은 저스틴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스틴의 내면은 이미 그녀의 우울증으로 인해 죽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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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스틴은 자신의 우울증을 '회색 줄이 자신의 몸을 휘감고 있는 느낌'이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묘사는 라스폰트리에 감독의 경험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감독이 우울증을 앓았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혹은 내가 가벼운 우울을 앓고 있을 때 이 영화를 봐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잔뜩 우울한 영화를 보는 내내 오히려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지구의 종말 앞에서도 의연해질 수 있는 우울의 무게를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울이란 사람을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고약한 속성이 있다. 우울 앞에서 저스틴은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마저도 뱉어내 버리고, 목욕을 하기 위해 클레어가 그녀를 부축해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이 영화는 매우 느린 속도로 담아내고 있다. <멜랑콜리아>가 잘 만든 영화라고 느껴졌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영화의 속도이다. 영화는 전적으로 저스틴과 클레어의 내면을 담아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내용의 호흡도 매우 느린 템포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통해 관객은 그녀들의 감정에 서서히 물들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감독이 저스틴의 우울증을 병적이고 부정적인 증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다시 한 번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저 우울을 우울 그 자체로만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위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타인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가 그들의 우울을 가볍게 어기는 언사를 일삼는 것이다. 우울하다고?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 좀 만나봐. 우울한 생각을 안 하면 되잖아. 재밌는 코미디쇼라도 좀 보고.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그들을 더 깊은 우울에 빠지게 만들 뿐이다.

  우울을 겪는 사람들에게 우울이란 그들의 일상의 전부를 잠식시킨 존재이다. 우울증이 그 어떤 것보다도 무겁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울의 감정은 그들이 잠든 사이에 점차 자라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우울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한 마디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우울은 지구 종말보다 무겁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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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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