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굿, 바이-죽음의 아이러니

글 입력 2014.12.2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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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굿, 바이」리뷰
 
 
<죽음의 아이러니>
 
 
  
  인간은 생명을 부여받음으로써 삶이라는 거대한 길을 걷게 된다. 따라서 극히 일부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삶’의 시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기쁨을 타인과 공유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삶’의 종결을 받아들여야하는 수용의 미학이 요구된다. 삶의 영원함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삶’의 아름다움은 ‘죽음’이 실재함으로써 빛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현재,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현저히 의연해지거나 담담해졌다. ‘죽음’을 더 이상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삶’의 종결은 또 다른 ‘죽음’의 시작을 알린다. 이러한 견해는 동양사상에 기반을 둔 것으로써,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연결되어있는 존재라고 믿는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두 번째 시작인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시작은 삶의 시작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비례하지 않는다. 숨을 쉬는 인간과 숨을 쉬지 않는 인간간의 공존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있을 때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죽음의 시작을 맞이하길 원한다. 죽음의 시작 또한 아름답게 비춰지길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의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장의사다.
 
  장의사는 하나의 직업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죽은 사람의 시체 처리에 대한 여러 가지 업무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들은 전문적으로 일을 수행하기에 일반인이 죽음을 다룰 때 보다 좀 더 위생적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족 중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장의사를 서슴없이 부른다.
  그렇다면 당연히 장의사는 자신이 하지 못하는 고인의 죽음의 시작을 아름답게 해주는 존재이므로 추앙받거나 존경받아야할 존재여야 한다. 하지만 영화 『굿, 바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장의사라는 직업은 그리 좋지 못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여기서 ‘죽음의 아이러니함’이 발견된다.
 
  사람들은 분명히 자신의 죽음도 아름답길 원하며 그것을 가족들이 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가족들은 우선적으로 죽은 사람의 몸을 처리할 수 있는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다. 따라서 자연스레 장의사의 역할이 필요하게 되고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고마움이라는 감정을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장의사의 이미지를 ‘돈’과 ‘더러움’으로 한정지어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삶을 부여받는 10달 동안의 드는 비용과 죽음을 아름답게 하는 비용은 거의 비례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에 드는 비용을 더욱 아까워하며 어차피 죽은 사람에게 ‘돈’을 써봤자 무엇을 하겠냐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죽음의 첫 번째 아이러니함이 발견된다. 즉,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아름다움의 비용은 높게 측정되지만 타인의 비용은 낮게 측정되는 이기적인 아이러니함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 없는 고인의 죽음을 ‘시체’로 여기는 습관이 존재한다. 여기서 ‘시체’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으로써, 장의사는 이것을 ‘처리하는‘ 사람으로 하대 받는 인간으로 여겨진다. 더불어 장의사에게 지불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에, 사람들에게 반감을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의 죽음을 관리해주는 ’장의사‘는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면서도 타인의 죽음을 관리하는 ’장의사‘는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상반된 아이러니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듯 장의사는 일시적인 감사함과 소멸하지 않는 부정적인 단어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영화 『굿, 바이』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죽음’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다. 죽음을 삶과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으로써 죽음의 이별을 ‘당연’하듯이 여겨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영화의 소재로 쓰인 ‘장의사’에 대한 상반된 시선과 결부되어 생각해봐야 할 ‘죽음의 아이러니함’ 또한 면밀히 살펴봐야 할 대상이다. 과거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닌, 현재에도 이러한 생각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굿, 바이』라는 영화를 본 사람들은 쉽게 죽음이 끝이 아닌 삶의 연장선 속에서 이어지는 시작이라는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공통된 범주 내에서 사람들은 왜 타인의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이며 죽음의 아름다움을 관리하는 ‘장의사’에 대한 상반된 시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동시에 품어야 한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중요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영화의 감상평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죽음에 대한 이차적 생각 또는 더 깊은 삼차적 생각을 함으로써 영화가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생명을 부여받음으로써 삶이라는 거대한 길을 걷게 된다. 따라서 극히 일부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삶’의 시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기쁨을 타인과 공유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삶’의 종결을 받아들여야하는 수용의 미학이 요구된다. 삶의 영원함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삶’의 아름다움은 ‘죽음’이 실재함으로써 빛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현재,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현저히 의연해지거나 담담해졌다. ‘죽음’을 더 이상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삶’의 종결은 또 다른 ‘죽음’의 시작을 알린다. 이러한 견해는 동양사상에 기반을 둔 것으로써,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연결되어있는 존재라고 믿는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두 번째 시작인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시작은 삶의 시작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비례하지 않는다. 숨을 쉬는 인간과 숨을 쉬지 않는 인간간의 공존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있을 때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죽음의 시작을 맞이하길 원한다. 죽음의 시작 또한 아름답게 비춰지길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의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장의사다.
  장의사는 하나의 직업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죽은 사람의 시체 처리에 대한 여러 가지 업무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들은 전문적으로 일을 수행하기에 일반인이 죽음을 다룰 때 보다 좀 더 위생적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족 중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장의사를 서슴없이 부른다.
  그렇다면 당연히 장의사는 자신이 하지 못하는 고인의 죽음의 시작을 아름답게 해주는 존재이므로 추앙받거나 존경받아야할 존재여야 한다. 하지만 영화 『굿, 바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장의사라는 직업은 그리 좋지 못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여기서 ‘죽음의 아이러니함’이 발견된다.
 
  사람들은 분명히 자신의 죽음도 아름답길 원하며 그것을 가족들이 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가족들은 우선적으로 죽은 사람의 몸을 처리할 수 있는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다. 따라서 자연스레 장의사의 역할이 필요하게 되고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고마움이라는 감정을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장의사의 이미지를 ‘돈’과 ‘더러움’으로 한정지어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삶을 부여받는 10달 동안의 드는 비용과 죽음을 아름답게 하는 비용은 거의 비례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에 드는 비용을 더욱 아까워하며 어차피 죽은 사람에게 ‘돈’을 써봤자 무엇을 하겠냐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죽음의 첫 번째 아이러니함이 발견된다. 즉,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아름다움의 비용은 높게 측정되지만 타인의 비용은 낮게 측정되는 이기적인 아이러니함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 없는 고인의 죽음을 ‘시체’로 여기는 습관이 존재한다. 여기서 ‘시체’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으로써, 장의사는 이것을 ‘처리하는‘ 사람으로 하대 받는 인간으로 여겨진다. 더불어 장의사에게 지불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에, 사람들에게 반감을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의 죽음을 관리해주는 ’장의사‘는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면서도 타인의 죽음을 관리하는 ’장의사‘는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상반된 아이러니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듯 장의사는 일시적인 감사함과 소멸하지 않는 부정적인 단어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영화 『굿, 바이』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죽음’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다. 죽음을 삶과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으로써 죽음의 이별을 ‘당연’하듯이 여겨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영화의 소재로 쓰인 ‘장의사’에 대한 상반된 시선과 결부되어 생각해봐야 할 ‘죽음의 아이러니함’ 또한 면밀히 살펴봐야 할 대상이다. 과거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닌, 현재에도 이러한 생각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굿, 바이』라는 영화를 본 사람들은 쉽게 죽음이 끝이 아닌 삶의 연장선 속에서 이어지는 시작이라는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공통된 범주 내에서 사람들은 왜 타인의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이며 죽음의 아름다움을 관리하는 ‘장의사’에 대한 상반된 시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동시에 품어야 한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중요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영화의 감상평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죽음에 대한 이차적 생각 또는 더 깊은 삼차적 생각을 함으로써 영화가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윤수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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