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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옴짝달싹할 수 없게 완전히 뒤틀린 가족사 - 튤립 [연극]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 어떠한 흔적을 남기는가

by 진세민 에디터
2026.03.1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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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무대 속 튤립만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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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튤립>의 무대는 검정의 유광 페인트로 사면이 거칠게 칠해져 있다. 단출하기보다 황량한 무대다. 연극이 시작되면 배우들은 무대 아래 쪽문으로 들어와 무대 위로 올라간다. 무대에는 출구가 없다. 막과 막 사이, 본인에게 주어진 대사가 없는 장면에서조차 배우는 퇴장 없이 무대 위에 계속 존재한다.

 

검은 무대의 오른쪽 아래에는 검은 모래밭이 있다. 연극 <튤립>은 바로 이 검은 땅 위 조선 까마귀 쿠로의 대사로 시작한다. 쿠로가 조선 까마귀라 불리는 까닭은 얼굴에 검은 페인트 흔적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러일전쟁 당시 강제노역 과정에서 생긴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다. 쿠로는 도쿄 대학 한구석에서 정원을 만들고 튤립을 가꾼다. 쿠로가 튤립을 가꾸는 것은 이 대학에 다니는 학생 쥬리프(튤립)를 위해서이다. 쿠로는 쥬리프에게 ‘도련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하지만 동시에 둘의 관계는 친근하고 푸근하다. 쥬리프에게 쿠로는 학교에 있는 유일한 친구다. 어느 날 졸업을 앞둔 쥬리프는 쿠로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연극은 쥬리프가 사는 고급 주택을 커다란 미술작품과 쥬리프의 어머니 에리코가 자신의 남편 야마토에 반항하듯 가득 채워 넣은 화병으로 구현한다.

 

검정으로 가득 찬 무대와 튤립을 피워내는 검은 모래밭은 쿠로를 상징하는 듯하다. 반면 밝은 색채의 화병과 액자는 쥬리프를 보여준다. 쥬리프는 밝은 미소와 새털 같은 몸짓으로 쿠로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 에리코를 살갑게 대한다. 쥬리프는 쿠로가 가꾼 교정 내 작은 튤립밭을 사랑한다. 쿠로는 쥬리프의 이 사랑을 사랑한다. 연극의 시작에서 쿠로는 쥬리프에게 튤립을 가꾸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쿠로는 튤립이 꽃이 아니라 구근을 키우는 식물임을 말한다. 튤립은 그 자체로 연극 속 인물들의 관계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쿠로는 튤립을 피워내는 검은 흙이다. 쥬리프는 이름과 같이 환하고 밝은 튤립꽃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구근은 누구인가. 그의 부모인가.

 

 

 

전장 밖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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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튤립>에 전쟁은 등장하지 않는다. 단정한 도쿄의 대학교와 고급 주택에는 전쟁의 쇠와 피가 감히 묻어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의 기억은 인물들의 대사에서 드러날 뿐이다. 연극 <튤립>의 대부분의 장면은 집에 초대받은 저녁 인물들 간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야마토와 에리코 부부, 쥬리프와 쿠로, 하녀 미호가 동시에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없다. 넓은 저택을 배경으로 인물들은 계속 이동하고 움직이기에 한 장면에는 보통 두세 명의 배우만 존재한다. 이러한 설정은 인물 간 정보의 지연 및 불평등을 의도적으로 구현하는 장치가 된다.

 

예를 들어, 쥬리프는 연극 초반 자신이 에리코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녀 미호로부터 확인하지만 야마토까지 자신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연극의 결말까지 알지 못한다. 에리코 역시 쥬리프가 전쟁을 나간 야마토가 데려온 아이임은 알지만 쥬리프의 출생에 대한 구체적인 경위는 쿠로의 등장을 통해서야 알게 된다. 야마토와 쿠로는 서로를 이미 알고 있다. 야마토는 과거 연추에서 막산이었던 한 노비의 갓난아기를 훔쳐 왔기 때문이다. 긴 세월이 지난 후 막산은 야마토를 다시 찾아왔고, 자기 아들이 공부하는 학교에 일자리를 요구한다. 야마토는 그에게 나카무라 쿠로라는 이름과 일자리를 준다.

 

쥬리프는 조선인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부잣집 도련님으로 키워졌다. 그렇다면 쥬리프의 구근은 무엇인가. 에리코는 남편이 업둥이로 데려온 쥬리프를 자신의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키웠다. 쥬리프는 식성도, 얼굴도, 습관도 자기 자신을 꼭 닮았다. 밖으로 떠도는 남편이 아닌 작고 연약한 아기가 자신의 삶을 단단히 잡아주었다. 쥬리프의 친부를 마주한 뒤 에리코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쥬리프가 온전한 일본인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에리코는 두려움을 통제하려는 듯 화사한 쥬리프를 계속하여 쓰다듬으며 어엿하고 온전한 일본인 청년이 되었음을 계속 확인한다. 에리코는 야마토나 쿠로처럼 헐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쿠로를 죽여 이 이야기를 끝낼 결심을 했다. 쥬리프는 쿠로가 이사를 마친 것으로 알고 자신도 일자리를 구해 집을 나설 준비를 한다. 그때 미호가 외친다. ‘사실은...’ 그 뒤 무대는 암전된다. 그 뒤의 이야기를 관객은 알지 못한다. 에리코의 바람대로 이 이야기는 온전히 끝날 수 있겠는가.

 

1904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도 전 러일전쟁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만주와 경성 연해주 연추를 지나 도쿄의 가정집으로 흘러들었다. 무대 위 다섯 인물의 관계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완전히 잘못되었다. 야마토와 에리코는 조선인 노비의 아기를 훔쳐 훌륭한 일본인 청년으로 키웠다. 야마토는 쥬리프를 이 혼란한 정세 속 군인으로 키우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자신과 반대로 노력했다. 그리고 쥬리프는 쿠로를 친구만으로 사랑하지는 않는 듯하다. 쿠로는 이 모든 사실 속에서 오직 쥬리프의 얼굴을 바라본다. 미호는 말했다. 하녀는 귀가 아주 크고 입이 아주 작다고. 미호는 이 복잡한 가족사의 개입되지 않은 가까운 외부자로서 모든 조각 난 진실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미호가 쥬리프에게 전할 말은 무엇이었을까.

 

연극 <튤립>은 전형적인 출생의 비밀 서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별적인 한 가족의 이야기는 이내 혼잡한 전쟁의 세계, 식민 지배의 제국성, 신분과 부의 차이를 복잡하게 그려내게 된다. 연극은 함부로 쥬리프를 단정 짓지 않는다. 즉, 쥬리프의 성장 배경을 인정함으로써 그를 함부로 조선인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자국에서도 자리 잡지 못하고 외국을 떠돌며 살아야 했던 쿠로, 막산에게 싶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단지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담담히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마음을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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