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땅 밑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SF작가 김보영의 동명 단편 소설 「땅 밑에」 (『다섯 번째 감각』, 2022, 아작 수록)을 원작으로 한다. 김보영의 단편 소설 「땅 밑에」는 땅 밑에 존재한다는 지국을 찾아 지하 미로를 탐사하는 하강자들의 이야기로, 연극 「땅 밑에」 역시 원작의 설정을 동일하게 따른다. 연극으로써 <땅 밑에>는 배우 없이 진행된다. 관객들은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인물들의 이야기와 사운드를 통해 극을 경험하게 된다. 2024년 우란문화재단에서 첫 공연을 펼쳤던 연극 <땅 밑에>는 2025-2026 ‘재연을 부탁해’ 공모를 통해 선정,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2026년 2월 다시 관객들을 맞이했다.
이토록 많은 암흑
연극 <땅 밑에>는 ‘사운드 이머시브 연극’으로 사운드 테크놀로지를 이야기 서사에 접목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했다. 무대는 존재하지만 배우는 등장하지 않기에, 관객은 무대를 빙 둘러싸고 앉아있을 뿐 연극의 모든 전개는 자신이 쓰고 있는 헤드폰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이런 점에서 연극 <땅 밑에>는 청각 경험이 극대화된 공연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극 <땅 밑에>의 또다른 강렬함은 시각 경험이었다. 무대는 극대화된 스피커와 극소화된 조명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암전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순간으로 여겨지지만, 어둠으로 가득찬 세계를 마주하는 것은 빛의 무대를 바라보는 것보다도 연극적인 시간이다. 한밤에도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도시에서 암흑은 맹렬한 불빛보다 낯설다. 눈을 뜨고도 마주하는 선명한 암흑은 관객을 지상의 세계에서 지하의 무대로 소환시킨다. 연출상 암전은 무대의 시작을 알리고, 막과 막, 장과 장 사이를 분할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관객의 시야를 가려 무대를 재설정할 시간을 마련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연극 <땅 밑에>에서 주목할 점은 암전의 지위를 연극 연출의 수단에서 목적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연극 <땅 밑에>는 관객이 무대에 들어서는 순간 연극이 시작된다. 다르게 해석하면 연극의 분명한 시작과 끝은 오디오를 통해 결정되지만, 연극의 시작과 끝마저 각 관객의 감각에 깊이 의존한다는 것이다. 관객은 로비에서 관객석으로 향하는 일반적인 경사로 대신 어둠속에서 가파른 나선형 철제 계단을 이용해 깊은 지하의 무대를 향해야 한다.
‘지국(地國)은 땅 밑에 있다. 그 이름이 뜻하는 바 그대로.
(...) 왜 우리가 지하를 동경하는지에 대해 의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건 왜 우리가 사랑을 하는지, 미워하는지, 외로움을 타는지, 싸우는지, 전쟁을 하는지 묻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질문이다. 옛날에 한 하강전문가가 그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내놓았고 아직 누구도 그보다 현명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김보영의 원작 소설 「땅 밑에」 역시 땅 속 세계인 지국을 배경으로 한다. 지국이라는 개념은 독자에게 현실의 천국을 대척점으로 창조한 세계로 느껴진다. 독자는 김보영의 「땅 밑에」의 문장을 읽지만, 그것은 읽기보다 감각하기의 경험이 농축된 소설이다. 아득한 어둠과 희박한 공기를 독자는 글을 통해 감각한다. 연극 <땅 밑에>는 원작 소설의 직관적 면모를 무대 공연으로 다시 창조했다.
배우 없는 연극 속 관객이 서 있는 곳은
연극의 3요소는 희곡, 배우, 관객으로 정리된다. 조금 더 확장된 4요소는 기존 3요소에 무대를 추가한다. 연극이 성립되기 위하여 배우와 관객, 희곡과 무대가 필요하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연극 <땅 밑에>에 배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고 보더라도 그것은 각자의 헤드폰 속 음성일 뿐이다. 또한 관객은 존재하나, 일반적인 무대 관람 방식과 상이한 부분이 있다. 무대는 다중의 공간이고,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대중이 모이는 곳이다. 우리가 연극 및 공연 예술에서 공공성을 발견하거나 추구한다면, 그것은 무대의 고유한 특성에 근거한 행위일 것이다. 이로 인해 연극을 관람하러 온 관객들은 오직 무대와만 관계 맺을 수 없다. 수많은 ‘방해’가 존재한다. 옆 사람의 기침 소리, 작은 움직임, 흐느낌 혹은 웃음소리를 우리는 객석에서 경험한다.
그러나 연극 <땅 밑에>는 배우와 관객, 즉 실체를 지닌 인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관객들은 텅 빈 중앙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서로를 응시할 수 있음에도 헤드폰으로 인해 관계에서 탈각되어 자기만의 공간에 머문다. 암전과 고요가 공연의 중요 요소인 만큼, 작은 움직임과 소음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배우는 헤드폰 속 음성으로만 존재한다. 헤드폰 속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지하로 하강하며 여러 곤경에 처한다. 우리는 바로 옆의 관객과의 소통도 차단 당한 채 인물들의 음성에 온 집중을 다한다. 그래서 관객은 연극 <땅 밑애>에서 어디에 머무는지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무대 위 배우의 연기를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이 관객임을, 무대 위 세계에 머물지 않고 관찰하는 자임을 인지한다. 그러나 연극 <땅 밑에>는 공연을 감각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내 귀에 속사이듯 들리는 소리와, 떨리는 의자, 장면에 따라 변경되는 무대 장치가 그것의 증거이다. 우리가 단지 관객이라면 왜 연극 속 음성들이 경험하고 감각하는 것을 동일하게 느껴야겠는가. 하지만 동시에 관객이 무대 위에 존재하는 것 역시 아니다. 관객은 무대와 객석에서 온전히 타자가 된다. 그것은 어쩌면 까마득한 암흑의 지국에 다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연극 <땅 밑에>는 전시를 관람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배우가 사라지고 관객이 개별화된 연극 <땅 밑에>가 여전히 연극일 수 있는 까닭에 대하여, 관객의 존재에 대하여 고민한다. 어쩌면 그 모든 구분이 무의미할 수 있다는 질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