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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함께는 늘 우리 곁에서 시작된다 - 커먼즈의 재생: 공공, 환대, 관용은 어떻게 회복되는가


 

요즘 '함께'라는 말을 쉽게 믿지 못한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개개인으로 또렷해졌고, 혼자 사는 삶은 흔해졌으며, 누군가와 맺는 관계는 선택이 되었다. 그리고 어렵게 맺어진 연결은 언제든 끊을, 끊길 수도 있다. 혼자 할 수 있는 자유는 커졌지만 그만큼 스스로 판단해야 할 일도 늘었다. 그래서 친한 친구, 가족이 아닌 타인을 신뢰하는 일은 점점 더 큰 결심이 된다. 날을 세우며 사는 날이 점점 늘어가다 보니 초등학생 시절, 도덕 시간에 배우는 함께 사는 것, 즉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공동체를 정말 믿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여전하다. 우리는 공동체를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공동체를 믿을 구조를 잃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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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다쓰루의 『커먼즈의 재생』은 이 질문을 감정적으로 보기보단 구조의 문제로 접근한다. 그가 말하는 커먼즈는 정서적 유대의 회복이 아니라, 판단이 이루어지는 ‘공공의 장’이며, 공동체는 좋은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검증하고 수정할 수 있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때 그는 과학철학자 포퍼를 끌어온다. 과학적 객관성은 특별히 중립적인 개인 덕분이 아니라, 비판과 반증을 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장 덕분에 성립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공동체는 선의의 강도가 아니라 반증 가능성의 정도로 유지된다. 내가 옳다고 끝내는 대신,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열어 두는 구조, 반대가 허용되고, 논쟁이 가능하며, 수정이 반복되는 장이 있을 때 공동은 지속된다. 요즘 우리가 피로한 이유는 어쩌면 말이 많아서가 아니라, 수정이 드물어서일지 모른다. 대게 판단은 각자의 타임라인에서 빠르게 끝나고, 결론은 확신으로 고정되어 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무성의하고 딱딱하고 건조한 설명이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이유는, 그 설명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설명에서 청중의 지성이나 판단력에 대한 신뢰나 경의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내 의견에 동의하든 말든, 내 의견의 진리성은 흔들리지 않아"라고 누군가가 귀에 대고 끊임없이 외친다면 얼마나 피로하겠는가. 그 말은 사실상 "너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라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너 같은 건 없어도 돼"라는 메시지를 계속 들으면, 그 저주는 산성 또 물질처럼 우리의 생명력을 서서히, 하지만 확실히 침식한다.

 

- 183p 발췌

 

 

나는 개인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대를 살아가며 개개인의 서사와 선택은 더 중요해졌고, 더 중요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모든 개인이 자기 확신을 '절대화'하는 순간 공동은 어려워질 가능성이 늘어난다. 그래서 공동체는 개인을 억압하고 무조건 하나의 체제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져야 하며, 그것이 공동의 출발점일지 모른다.


이때 저자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축은 '가장 약한 존재'다. 그는 구성원 가운데 가장 약한 존재를 통합의 축으로 삼는 공동체만이 지속 가능하다고 말한다. 강한 자의 속도나 평균적 편의를 기준으로 설계된 구조는 오래가기 어렵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무력한 존재를 포함하고, 함께 기르고 치유하며 지원하는 역동적인 구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윤리적 호소라기보다 약한 존재를 배제하는 순간, 공동체는 효율을 얻는 대신 신뢰를 잃고, 신뢰를 잃은 공동은 위기 앞에서 쉽게 분열하기 때문에 오래가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이러한 구조가 더 견고하다는 것이다.

 

 

어떤 집단이든 '마이너 멤버'를 포함한다. 영유아, 노인, 병든 사람, 장애인 같은 이들은 집단 내에서 도움을 주기보다는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이너 멤버'를 돌보는 일을 두고 '손해 본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공동체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모든 인간은 한때 유아였고 나중에는 노인이 된다. 언젠가는 병이 들거나 정신적 또 는 육체적으로 힘들어질 확률이 높다. 따라서 집단의 모든 구성원은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나의 또 다른 형태'이다. 집단에서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그랬을 나, 앞으로 그렇게 될 나, 그렇게 됐을 수도 있는 나'를 돕는 일이 나 다름없기에 '과거의 나, 미래의 나, 평행우주 속의 나'를 기쁜 마음으로 도와야 한다.

 

- 216p 발췌

 

 

그는 공공성을 시간의 차원으로도 확장한다. 현재의 합의나 다수 의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의 판단이 미래의 약한 존재에게 어떤 영향을 남기는지까지 생각할 때 공동은 비로소 장기적으로 유지된다. 공동체는 동시대인만의 결속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 포함하는 느슨한 연대이기도 하다. 지금의 편의만으로 설계된 구조는 결국 누군가를 뒤늦게 탈락시킬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공공의 장을 다시 세우는 일은 쉽지 않다. 나 역시 결론이 나 있는 것을 먼저 확실하게 알고 싶어질 때가 많다. 확신은 편하고 빠르다. 그러나 확신이 편한 만큼, 공동은 조금 느리고 번거로울 때가 많다. 반복되는 검증과 수정,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절차를 통과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약해졌다는 말에는, 그런 불편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우리의 사정도 섞여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커먼즈의 재생』이 남기는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정말 혼자서 모든 판단을 감당할 수 있는가. 아니면 판단을 맡길 장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외로워진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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