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리움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이불: 1998년 이후⟫에 다녀왔다. 전시는 2025년 9월 4일을 시작으로 2026년 1월 4일까지 진행된다.
⟪이불: 1998년 이후⟫는 지난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이불-시작⟫을 자연스럽게 잇는다. 이전 전시가 이불의 초창기 작업, 즉 1980~90년대 초반의 소프트 조각과 퍼포먼스를 통해 젠더, 사회, 계급, 인종을 다룬 실험적 시도를 조명했다면, 이번 전시는 그 이후의 시간 즉, 한 인간이 예술가로서 성숙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의 작품은 여전히 날카롭고 치열하지만, 더 이상 자기 내부의 불안을 해부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대신 인간과 기술, 문명과 유토피아, 그리고 우리가 발 딛고 선 시대 자체를 응시한다.
전시장 입구에 자리한 ‘취약할 의향 – 메탈라이즈드 벌룬’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20세기 초 기술 발전의 상징이자, 동시에 공중 폭발로 사라져버린 비행선 체펠린을 모티프로 한 이 거대한 은빛 작품은 찬란한 욕망과 그에 따르는 파멸의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 가능성과 위기의 이중성은 이불이 오래전부터 천착해온 주제다. 이불은 기술을 단순한 진보의 도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욕망, 두려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은 인간 자체에 대해 묻는다.
전시를 보고 2012년, 니콜라우스 샤프하우젠과 이불 작가의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다.
“삶이란 언제나 ‘인간 조건’이라 일컬어지는 본질적인 모순과 온전히 파악 불가능한 세계 속에서 우리를 이성적 존재로 상정하는 고정적 전통문화가 만드는 추정 사이의 불안한 틈 어딘가에 위치하는 듯합니다. (…) 예술이 유효한 매체인지 여부를 제가 답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예술이 나의 일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베케트의 오래된 구절처럼, 아마 계속할 수 없지만, 계속할 것입니다.”
이불의 작업은 바로 그 ‘불안한 틈’에서 태어나고, 거기 머문다. 초기의 소프트 조각이나 퍼포먼스가 젠더와 정체성이라는 개인적 출발점에서 세상을 향해 몸을 던졌다면, 이번 전시는 그 이후의 시간 속에서 예술가가 어떻게 ‘계속’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작품들은 더 이상 자기 고백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궤적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몽그랑레시’ 연작과 ‘애프터 브루노 타우트’ 에서 드러나는 근대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는, 과거 인류가 품었던 이상과 그것의 붕괴를 동시에 되짚는다. 그녀는 근대의 꿈을 단죄하지도, 찬미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환상의 흔적 위에 오늘의 우리를 비추며, ‘이상’이 사라진 시대에도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녀의 작품을 보며 인간이란, 모순과 불안 사이에 존재하면서도 계속해서 사유하고 창조하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속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조건이야말로 예술이 존재할 이유이자 근원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은 언제나 ‘계속함’의 미학이다. 베케트의 문장을 인용하던 그 목소리처럼, “계속할 수 없지만 계속하는” 예술가의 태도. 그것이야말로 변화하는 이불의 작가의 작업을 대변하는 목소리 아닐까.
전시장을 나서며 생각했다. 이불의 초창기 작업에서 느껴지던 날것의 에너지가 이번에는 정제되고, 차갑고,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아름답게 우리 시대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넘어서 세계를 사유하게 된 예술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녀의 작업을 통해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와 예술이 필요한 이유를 다시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