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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어둠이 가라앉은 무대에 첫 숨처럼 얇은 음이 길을 낸다. ‘퉁소소리’는 조선 중기의 고전 ‘최척전’을 오늘의 감각으로 불러오되, 주인공의 이름이 아닌 ‘소리’를 제목에 올려 개별 영웅담이 아니라 시대를 가로지르는 정동과 울림에 응답하겠다고 선언한다. 전란과 이별, 재회의 서사는 특정 시기의 비극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분쟁과 난민, 가족 해체 같은 현재의 현실 위에 얇지만 질긴 필름처럼 포개진다. 이 작품은 과거의 무게를 빌려오는 역사극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노동’시키는 연극이다. 초연 이후 평단과 관객의 호응, 굵직한 수상은 이 작품이 일회성 화제가 아니라 ‘지금-여기’의 문제를 정확히 건드렸음을 증명한다.

 

이 리뷰는 안쪽으로는 ‘비워냄’과 ‘채워냄’이 교차하는 연출 설계, 즉 무대를 덜어 관객의 상상력을 전면에 세우고(비워냄), 그 빈자리를 코러스와 앙상블로 다시 채워 장면의 압력을 만드는 과정(채워냄)을 추적한다. 바깥으로는 장기 리허설과 집단 출연, 형식 실험을 지탱한 공공 지원과 국공립 극단의 책무라는 제도적 조건을 함께 비춘다. ‘퉁소소리’의 힘은 장면 속 미학과 장면 밖 구조가 맞물릴 때 비로소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결합의 방식을 장면과 제도의 언어로 동시에 기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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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해학으로 변환하는 연출의 힘 ‘비워냄’과 ‘채워냄’


 

이 작품의 연출 핵심은 ‘비워냄’이다. 비워냄은 절약이 아니라 설계다. 화려한 장치로 공간을 ‘채우는’ 대신, 장면에서 불필요한 정보를 ‘지워’ 여백을 남긴다. 그 여백이 관객의 인지와 감각을 호출한다. 무대의 세트는 집이었다가 배가 되고, 이내 바다가 된다. 빗자루 하나가 말로 바뀌어 대지를 가른다. 물질은 그대로인데 관객의 머릿속에서 의미가 이동하며 공간이 재구성된다. 이는 기술적 트릭이 아닌 인식의 드라마다. 무엇을 보여 주지 않을지 선택하는 절제가 관객의 상상을 신뢰하는 태도로 이어질 때, 무대는 작은 제스처에도 세계가 흔들리는 민감한 장치가 된다.

 

이러한 비워냄과 짝을 이루는 장치는 ‘비극의 해학화’다. 해학은 감정 과부하를 낮추고 눈물과 웃음 사이에 ‘생각할 틈’을 만드는 기술이다. 그 과정은 이렇다. 첫째, 재경험은 작품 속 비극을 통해 자신의 슬픔을 다시 느끼고 억눌린 감정을 배출하는 단계다. 전쟁으로 헤어지는 장면을 보다가 과거의 이별이 떠올라 눈물이 맺히는 순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동일시는 극중 인물에게 감정이입해 ‘나도 저 사람 같다’고 느끼는 과정이다. 예컨대 옥영의 끈질김을 보며 ‘나도 저렇게 버텨야지’라고 마음먹는 지점이다. 셋째, 보편화는 내 고통이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자각이다. 객석 어딘가의 훌쩍임, 장면이 쉬어 갈 때 함께 길어지는 호흡의 리듬을 느끼며 ‘우리는 같은 것을 겪고 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이 그것이다. 해학은 이 세 단계를 잇는 다리처럼 작동한다. 웃음은 재경험의 과부하를 누그러뜨리고, 동일시가 자기연민으로 떨어지지 않게 ‘거리’를 제공하며, 보편화로 이동하는 길을 연다.

 

이렇게 비워낸 무대는 곧 배우들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다시 채워진다. 이때 핵심 개념은 ‘코러스’와 ‘앙상블’이다. 코러스는 고대 그리스극의 집단 목소리에서 출발해, 오늘의 무대에서는 합창과 군무, 호흡과 의성어로 추상적 감정을 한눈에 보이게 만드는 장치다. 파도 소리를 입으로 빚어 덧마루를 바다로 바꾸는 순간, 관객은 눈앞의 나무 바닥을 실제 수면처럼 체감한다. 출산과 죽음 같은 양가감정을 동시에 소리와 움직임으로 풀어내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의 결이 한 장면 안에서 부딪히고 섞인다. 반면 앙상블은 개별 배우의 기량이 하나의 호흡으로 맞물린 상태를 뜻한다. 특정 스타가 끌고 가는 장면이 아니라 ‘전체의 합’ 자체가 미학이 되는 지점이다. 누구의 몸이 어디서 얼마나 ‘미세하게’ 늦고 당길지, 어떤 음절에서 호흡을 얼마나 길게 내뱉을지 같은 결정들이 리허설에서 정밀하게 합의될 때, 몸과 소리가 한 방향으로 압력을 밀어 올린다. 그 압력이 관객에게는 장면의 밀도로 감지된다.

 

 

 

공공 지원과 국공립 극단의 필요성


 

이러한 연출 구조는 흥행 성적표로만 의사결정을 내리는 민간의 시간표와 비용 구조 속에서는 버티기 어렵다. 장기 리허설이 필요한 이유부터 분명히 하자. 배우가 많아질수록 장면의 ‘합’과 ‘호흡’을 맞추는 시간은 선형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단순 동선 암기가 아니라, 시선의 방향과 타이밍, 코러스 의성어의 길이와 강도, 합창의 음정과 발성 위치가 공간의 잔향과 어떻게 결합하는지까지, 몸과 소리가 ‘하나의 호흡(앙상블)’으로 잠기려면 반복과 미세 조정이 필수다. 이 과정은 하루 두세 시간의 워크스루로 해결되지 않는다. 수주에서 수개월의 리허설만이 장면의 밀도를 만든다. 집단 출연은 비용의 양태도 바꾼다. 단순 출연료 총액 증가를 넘어 스케줄 조정, 대체 인력 운영, 부상 방지를 위한 컨디셔닝 등 보이지 않는 운영 비용이 덧붙는다.

 

형식 실험 역시 마찬가지다. '퉁소소리'와 같은 연출적 실험은 실패 가능성을 품는다. 그 실패를 창작의 자산으로 돌리려면 충분한 시간과 예측 가능한 재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공공 지원이 하는 일이 분명해진다. 공공은 창작의 앞단(리서치·자료 조사·드라마투르기), 중단(리허설·테크 런·프리뷰), 뒷단(유통·재연·투어)에 ‘시간’을 붙인다. 동시에 표준계약, 4대 보험/고용보험, 안전 매뉴얼과 복지 장치를 통해 무대 뒤 노동의 질을 지킨다. 노동의 질이 보장될 때만 반복과 미세 조정이 가능하고, 그 반복이 장면의 질로 환원된다.

 

그러나 시장 경제의 논리는 이를 뒷받침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순하다. 예를 들어, 8주 리허설이 필요한 공연을 3주로 ‘줄여’ 올리면, 관객은 비슷한 표 값을 내고도 덜 준비된 작품을 보게 된다. 이 손실은 장부에 잡히지 않지만 경험의 질 하락이라는 사회적 비용으로 남는다. 특히, 가족 단위 관람이 남기는 세대 간 대화, 지역 순회가 만드는 문화 접근성의 평준화, 창작 생태계 유지로 다음 세대가 누리는 보이지 않는 혜택 같은 가치들은 시장 가격으로 온전히 평가되기 어렵다. 그렇기에 리허설·인력·실험이 구조적으로 줄고, 단기 회수 가능한 포맷만 살아남는다. 다양성과 실험이 사라진 생태계는 결국 대중성마저 잃는다. 관객은 반복된 서사와 어법에 피로해지고, 중장기적으로 수요 기반이 약해진다. 이는 예술에 대한 공공지원과 국공립 극단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퉁소소리’는 예술성·대중성·공공성이 선순환할 때 어떤 설득력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장기간 리허설을 통해 합과 호흡을 확보했고, 집단 출연과 코러스·앙상블의 설계를 통해 개인의 감정을 공동의 체험으로 변환했다. 이러한 선택들이 가능한 배경에는 '서울시극단'이라는 공공적 안전망이 있었다. 이제 필요한 일은, 이 성취를 우연한 예외로 남기지 않고 ‘정책의 가능성’으로 고정하는 것이다. 심의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집행의 속도를 보장하며, 평가에서 형식 혁신과 실패의 용기를 정식 요건으로 삼는 것. 그리고 레퍼토리 운영에서 합·밀도를 유지하는 매뉴얼을 축적·공유해, 한 편의 성공을 한 시즌의 체질로 확장하는 것. 그렇게 할 때, ‘퉁소소리’가 보여준 미학적·제도적 성취는 한밤의 잔향이 아니라 다음 작품의 조건이 된다.

 

 

 

결론


 

공연이 끝난 뒤에도 객석의 공기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퉁소의 첫 음이 공기를 가르던 순간처럼, 코러스의 호흡과 앙상블의 압력은 관객의 몸 어디쯤에 잔향으로 남아 천천히 가라앉는다. ‘퉁소소리’가 남긴 것은 비극을 지워 버리는 위로가 아니라, 비극을 통과해도 부서지지 않는 위로다. 해학은 재경험의 과부하를 낮추고 동일시를 자기연민 바깥으로 이끌며, 보편화로 건너가게 하는 가교였다. 그래서 이 작품의 희망은 구호가 아니라 기술이고, 홀로의 인내가 아니라 함께의 리듬이다. 우리는 그 리듬을 ‘살아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문장 속에서 듣는다. 좋은 일은 우연처럼 오지 않는다. 숨을 고르고,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견딜 수 있도록 구조를 가다듬을 때 도착한다.

 

이번 공연이 가능했던 것은 형식 실험을 지탱한 공적 시간과 사회적 안전망 덕분이었다. 시장 실패와 가치재라는 말은 차갑지만, 실감은 따뜻하다. 심의가 제때 이루어지고, 집행이 지연되지 않으며, 평가가 형식의 새로움과 실패의 용기를 정식으로 다룰 때 예술의 시간은 비로소 작품의 질로 환원된다. 국공립 극단이 의제의 현재성과 미학의 다양성, 접근성과 지속가능성을 분리·병행하는 운영 구조를 세울 때 한 편의 성취는 레퍼토리의 체질로 확장된다. ‘퉁소소리’가 증명한 예술성·대중성·공공성의 선순환을 우연한 예외가 아니라 ‘정책의 가능성’으로 고정하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이어갈 다음 장면이다.

 

끝으로, 글을 마치 ‘연극in’ 휴간 소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in은 서울문화재단이 2012년부터 운영해 온 연극 전문 온라인 매체다. 현장 예술가·평론가가 참여해 비평과 인터뷰, 신작 희곡 등을 싣는 ‘공공 비평 공론장’ 역할을 해 왔다.

 

한 도시의 예술은 무대 위 장면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장면을 말로 이어 주는 기록과 논쟁,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말을 붙이는 공론의 습관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을 오래 견뎌 온 매체가 멈추었다는 사실은, 코러스의 한 파트가 빠진 공연처럼 호흡 어딘가를 휑하게 만든다. 데이터와 홍보로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다는 것을, 관객과 예술가, 비평가 모두가 알고 있다. 아쉬움은 곧 당부이기도 하다. 행정의 언어가 아니라 현장의 언어로, 늦지 않은 심의와 투명한 집행, 실패를 품는 평가, 그리고 독립 비평의 공간을 함께 회복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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