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가을이다. 쓸쓸함을 내버려두지 않고, 떠나가는 것들을 기꺼이 배웅한다. 계절성 우울의 많은 지분을 담당하는 가을이 오면 나 또한 ‘가을을 탄’다. 푹푹 꺼지는 기분에 골이 나지만,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아침저녁으로 긴팔을 찾을 선선한 날씨가 되니 괜히 걸음을 하나둘 더 옮겨 도서관을 기웃거리게 된다. 충동적으로 고른 책이 그저 내 책장에만 잠깐 머물다가는 날도 있겠지만, 못 이기는 척 꺼내보는 날도 많을 것이다. 바람이 책장을 스르르 넘겨주는 독서의 계절이다.
나의 순수 독서 이력은 그리 길지 않다. 솔직히 독서를 싫어했고, 그보다는 어려워했다.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굳이 책을 한 장 더 펼쳐보는 건 생각보다 힘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번 책에 빠지면 그간 스트레스를 풀고자 했던 행위들이 사실은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통을 자극으로 잊으려 했지만, 결국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요즘은 힘들 때 책을 찾는다. 오늘도 책을 찾았다.
그럼에도 책 한 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보는 일은 쉽지 않다. 언젠가 강박이 심했던 시기에는 읽던 책을 끝내지 못하면 다른 책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한 권의 책을 1년 동안 붙잡고 꾸역꾸역 읽었던 적도 있다. 이렇게 직렬 독서만을 고집하던 내가 ‘병렬 독서’에 맛을 들이고 나서는 조금 달라졌다. 더 정확히는 ‘관식이식 독서법’을 익혔다. 수틀리면 빠꾸(?)다. 그러나 중도 포기는 찝찝함을 남기기 마련이다. 다른 계절보다 유난히 짧은 가을에 그런 상실감을 더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누구든 펼치면 입동(立冬)전에 끝을 볼 수 있는 적당한 분량의 책 3권을 골라 소개해 보려 한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제목만큼이나 강렬한 첫 문장으로 기억되는 고전이다. 주인공 요조는 다자이 오사무를 자전적으로 재현한 인물로 가정 배경, 여성 편력 등 공통적인 부분이 많다. 어쩌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것이 다자이의 생애다. 이 책은 자살, 자기혐오 등 암울한 소재를 다분히 담고 있지만, 그래서 다른 문학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누군가는 이유 모를 우울감과 갈 곳 잃은 내면의 묘사를 이 책을 통해 해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행복은 저온화상을 남긴다. 뜨겁지 않아서 방심했다가 화를 부르는 격이다. 이런 날에는 아픔보다 더 큰 배신감에 시달려야 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은 종종 이렇게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 딱지가 생기고 차마 내 손으로는 긁을 수 없었던 곳을 긁어준다. 가렵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음을 상기시킨다.
아아, 이 사람도 틀림없이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중략)
그건 그가 불행을 알아보는 불행한 자의 눈을 가진 까닭이다. 동병상련의 공식이 여기서도 작용한다. 어쩐지 책에서는 가을에 떨어진 낙엽을 태우는 냄새가 나고, 책을 덮고 나면 그 남은 불로 담배를 태우는 한 남자가 그려진다.
박정민, 『쓸 만한 인간』
쉬겠다고 했지만, 여느 때보다 바빠진 박정민 배우의 산문집이다. 흔히 아는 산문보다는 어쩌다 들춰본 일기 같다(남의 일기는 함부로 보면 안 되긴 하지만). 어쩐지 가끔 부끄러움은 내 몫이다. 그와 유머 코드가 맞는 사람이라면 다른 책들보다도 이 책이 더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별 사정이 없다는 사정으로 인해 벌써 한 달째 쉬고 있다.
그의 유머는 사소한 말장난에서 시작된다. 때로는 유머 같지 않고 자조 같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 피식 웃게 되지만, 그게 또 그렇게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혹 가을에 다가오는 상실의 감정을 회피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그는 독자의 도망을 있는 힘껏 응원해 줄 것이다.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 책을 챙겨가길 추천한다. 휴대전화보다 가벼운 무게를 더함으로써 여행이 더 깊어질 것이다. 여행에 가서 책을 읽는 상상은 누구나 한다. 나도 수차례 도전해 봤지만, 책 말고도 이미 짐이 많은 보부상에게 무게감 있는 책을 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한 변덕 하는 사람이기에 기껏 챙겨간 책을 여행지에서는 몇 장 펼쳐보지 못하고 다른 책을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이 가을에 읽을 책은 가볍다(쓸 만한 인간이 그나마 분량이 있는 편이지만, 절판인 관계로 e-book으로 읽으면 0g인 셈). 특히 시집은 그런 면에서 부담이 적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만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시집에서 특별히 계절감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황량하지만, 어느 때보다 추수한 것이 많은 가을을 느낀다. 가장 단순하게는 표지 때문이다. 여지없이 가을의 색이다.
책장은 포화 상태
아직 읽을 책이 많지만, 또 책방을 기웃거린다. 잔말 말고 파워 냉방을 틀어주던 여름의 피서지는 이제 방앗간이 되었다. 짧은 이 계절은 금세 겨울에 저버린다. 이제부터 가을옷을 준비해야 하듯, 이 짧은 독서의 계절을 보낼 책을 미리미리 구비해야 한다. 낙엽을 책갈피 삼아보고, 사람 없는 벤치에 누워 하늘을 독서대 삼아보는 가을 독서의 낭만을 누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