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은 누군가에겐 혁명이지만, 누군가에겐 위협이다. 인간은 겉으론 새로움을 열망하면서도 내심 거부하는 이중성을 가졌다. ‘선’을 넘지 않는다면 새로움은 혁신이고 신선함이지만, 선을 넘는 새로움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된다. 그 선의 기준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 것일까. 각자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극명하게 다를 것이다.
Open AI가 개발한 대화 전문 인공 지능 챗봇인 챗GPT를 활용해 단 몇 초 만에 지브리 스타일의 이미지를 생성하는 ‘놀이’는, AI(Artificial Intelligence : 인공 지능)를 잘 모르던 사람들에게까지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림을 업으로 삼는 창작자들은 지브리 화풍 이미지가 하루 수백만 건 생성되는 걸 남 일처럼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일자리를 AI가 위협, 대체하는 것이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브리지만 다음은 내 차례가 될 수도 있단 걸, 그림이 직업인 창작자들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이젠 누구나 챗GPT에 프롬프트(명령어)를 입력하는 것만으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다. 물론 AI가 생성한 이미지는 티가 나고, 사람의 섬세함과 감성을 AI가 따라올 순 없단 의견도 많다. 하지만 대다수는 빠른 속도와 편리함을 택한다. AI가 만든 이미지는 기존에 인간이 완성한 수많은 이미지를 수집, 학습, 응용해 생성하는 것이다. AI의 빠른 성장은 이처럼 저작권 침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 AI를 창작에 활용하는 것은, 연일 수많은 갑론을박을 낳는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은 오랫동안 전 세계에서 다양한 형태로 공연됐다. 특히 2024년 대한민국 공연계는 ‘햄릿의 해’였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신시컴퍼니의 <햄릿>, 배우 조승우가 데뷔 후 처음 도전한 연극이라 화제였던, 원작에 가까운 신유청 연출가의 <햄릿>, 배우 이봉련의 여성 햄릿을 내세워 원작의 여성 혐오를 비틀고 거트루드를 정치적인 인물로 해석한 국립극단의 <햄릿>, 국립창극단 단원인 이연주 소리꾼의 1인 창극 <햄릿>까지. 두 병사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를 주연으로 내세운 연극 <버나르도&프란시스코> 또한 햄릿을 새로운 각도에서 다뤄 호평을 받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복수극이다. 또한 인간의 다양한 심리와 심연에 가까운 내면까지 다각도로 파고든 심리극이기도 하다. 선왕인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하는 덴마크 왕자 햄릿은, 복수의 기회가 와도 바로 실행하지 않는다. 미친 척을 하고, 고뇌하다 포기하고, 사랑하다 증오하고, 비아냥대면서도 상처받는 생각 많은 인물이다. 햄릿의 내면을 묘사하는 독백 또한 많은 작품이기에, 등장인물이 여럿이라도 1인극으로 각색하기에 좋은 극이기도 하다.
이모셔널씨어터가 ‘The Voice Series’ 첫 번째 작품으로 내세운 뮤지컬 <보이스 오브 햄릿 : 더 콘서트>는 햄릿 1인칭 시점의 1인극, 록 콘서트 형태의 뮤지컬, 또한 AI와 인간 창작자의 공존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AI가 만든 포스터를 쓰는 건 암암리에 알려진 일이었지만, AI와의 협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건 아직은 생경한 일이다. 따라서 젠더프리 햄릿·1인극·록 뮤지컬이란 매력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작품 공개와 동시에 많은 담론이 오갔다.
이모셔널씨어터와 국립극장이 공동 주최한 <보이스 오브 햄릿 : 더 콘서트>는 5월 16일에 개막했으며, 6월 28일에 막을 내린다.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 중인 작품은 햄릿 역할에 옥주현, 신성록, 민우혁, 김려원을 캐스팅했다. 이모셔널씨어터의 AI 기반 작품 모델을 통해 콘셉트와 트리트먼트를 구축한 극은, 극작뿐 아니라 작곡에도 AI 기술을 활용했다. 오필영 아티스틱 디렉터는 AI가 제안하는 문장·단어·감정선·음악적 접근 방식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강렬한 인더스트리얼 록(인더스트리얼 음악과 록을 합친 퓨전 장르) 콘서트 형식의 극은 철저하게 햄릿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대다수 1인극에서 한 배우가 여러 역할을 연기하는 것과는 달리, 작품은 세상을 떠난 햄릿의 시선에서만 이야기가 펼쳐진다. 즉 원작에서 햄릿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들은 극에도 나오지 않으며, 대신 새로운 장면이 추가됐다.
선왕 살인 사건을 빗댄 극중극을 하며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를 조롱한 햄릿은 영국으로 추방된다. 햄릿이 탄 배를 폭풍우가 덮치고,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의식을 잃은 그는 눈을 뜬다.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단 사실에 절망하는 햄릿은 ‘여기가 지옥이겠구나’라고 읊조린다. 그의 말처럼 햄릿은 피의 복수극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삶이란 지옥에서 벗어난다.
햄릿의 연인이지만 수동적·기능적으로 다뤄지는 오필리어를 비롯해 숙부와 결혼한 어머니 거트루드를 다루는 방식 또한 원작에선 여성 혐오적이다. 따라서 오늘날 햄릿을 무대에 데려오려면 이에 대한 사유와 재해석은 필수다. <보이스 오브 햄릿 : 더 콘서트>에선 거트루드에 대한 애증은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랐지만, 오필리어는 훨씬 더 애틋하게 여기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그렸다. 오필리어의 오빠이자 햄릿의 복수로 인한 또 다른 피해자, 레어티즈 또한 그저 ‘친구’라 언급했다. 이처럼 자식 세대(햄릿·레어티즈·오필리어)가 부모 세대(클로디어스·거트루드·폴로니어스)의 죄를 물려받은 피해자에 가깝다는 시선도 담아낸 극이기도 하다.
5월 24일 오후 6시 공연엔 배우 김려원이 무대에 올랐다. 김려원은 중소극장과 대극장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뮤지컬 배우다. 그는 2025년에만 <스윙 데이즈_암호명 A>, <종의 기원> 무대를 마쳤고, 현재는 <보이스 오브 햄릿 : 더 콘서트>와 <라흐 헤스트>를 함께 공연 중이다. <올랜도 in 버지니아>, <마리 퀴리>에도 출연 예정인 김려원은 탄탄한 실력과 무대 내공, 성실한 작품 활동, 스타성으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김려원은 엠마·리지 두 역할로 열연한 대표작 <리지>를 포함 <헤드윅>, <트레이스 유> 등 여러 록 뮤지컬에서 폭발적인 가창력을 이미 증명한 바 있다. 따라서 햄릿의 여러 감정을 쏟아내는 초고음 넘버들이 다수 포함된 <보이스 오브 햄릿 : 더 콘서트> 또한 거뜬하게 소화해 냈다. <더 라스트맨>으로 이미 1인극 무대에 섰었던 그는, 풍부한 무대 경험에서 비롯된 노련함으로 관객 소통 때도 유연하게 호응을 끌어냈다. 1인극은 배우의 역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르다.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다작하는 배우인 김려원은 록 뮤지컬에서 특히 더 빛난다는 평을 들어 왔다. 따라서 그는 <보이스 오브 햄릿 : 더 콘서트>에서도 무대에 서는 단 한 명의 배우이자 주인공으로서 역량과 개성을 마음껏 펼쳤다.
극중극 전, 햄릿은 객석에 내려와 ‘햄릿이 미쳤다’는 소문을 내달라고 관객에게 부탁한다. 배우와 관객이 웃으며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장면이면서도, 극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지만 초연이라 작품이 아직 낯설고, 음향 문제로 가사 전달이 원활하지 않아 넘버에 맞춰 관객도 쉽게 즐기기 힘든 건 아쉬운 요소다. 클로디어스가 기도하는 장면의 조명 연출, LED 패널을 통한 영상 송출은 고전을 현대화하는 데 이점으로 작용한 세련된 연출이었다.
복수극의 고전인 <햄릿>은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로 변주돼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햄릿>은 2025년 AI를 만나 <보이스 오브 햄릿 : 더 콘서트>라는 또 다른 새로운 얼굴로 관객 앞에 섰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예술 및 창작 업계에서도 AI를 똑똑하게 잘 이용하는 사람이 오래 살아남는다. <보이스 오브 햄릿 : 더 콘서트>는 공연계에서 그 물꼬를 터주는 작품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인간이 오랜 시간 고민해 창작한 작품들을 무단으로 학습해 결과물을 생성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생각 못 한 부분들을 ‘제안’하고 ‘협력’하는 범위라면 AI는 창작의 적이 아닌 좋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AI에 윤리와 양심을 요구하려면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은 필수다. 창작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게 아닌, 인간의 영감을 변주하고 자극해 다채로운 결과물을 탄생시키는 방향으로 AI가 활용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