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피아노로 나누는 대화 - 2024 게자안다 콩쿠르 위너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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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근처에 위치한 예술의전당은 나의 점심시간 소화코스 중 하나다.
여의도 근방에서는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회전초밥처럼 점심시간에 공원을 빙빙 산책할 수 있는 여의도 공원이 있다면, 서초 직장인들은 예술의전당과 우면산 무장애숲길로 모인다.
밤에는 퇴근하기 바빠 들리지 못했던 저녁 시간의 예술의전당은 정오 시간대에 뿜어내던 에너지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공연의 설렘을 안고 예술의전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틈에 슬쩍 몸을 얹어본다.
오늘의 공연 메이트인 엄마와도 팔짱을 끼고 게자안다 콩쿠르 위너 콘서트가 열리는 콘서트홀로 향한다.
콘서트홀에 입장하자마자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였다. 몇 차례 다녀왔던 연주회에서는 언제나 무대 위에 다양한 악기가 있었기 때문일까, 무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도 나는 과연 이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이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지우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나의 기우였다.
관객들의 박수갈채와 함께 등장한 일리야 슈무클러는 정말이지 피아노 속으로 빠져 들어갈 듯한 집중력을 보이며 관객들을 자신의 연주 속에 서서히 스며들게 만들었다.
콩쿠르 우승자에 걸맞은 일리야 슈무클러의 애티튜드와 테크닉은 마지막으로 피아노 건반을 눌러본지도 벌써 10여 년이 훌쩍 넘은 내게도 그의 연주가 귀로 들어와 가슴에 맺히는 경험을 몸소 가능케 하였다.
이번 리사이틀은 총 5곡이 연주되었다.
1부에는 바흐와 슈베르트, 리스트의 작품이, 2부에서는 드뷔시와 무소륵스키의 작품으로 이번 공연을 탄탄히 채워 넣었다. 사실 내겐 그들의 작품보다도 연습실 이름으로 유명했는데, (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의 연습실은 유명한 음악가의 이름을 따서 부르곤 하였다.) 이들의 곡을 생생한 건반의 움직임으로 다시 들어보니 감회가 몹시 새로웠다.
피아노 학원에서 하라는 연습은 안 하고 백건과 흑건의 개수를 세며 시간 때우기 바빴던 비좁았던 연습실 골방의 이름이 바흐였으며 슈베르트였고 드뷔시였다는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는 것이다.
1부가 끝난 뒤 이번 위너 콘서트에 함께 동행한 엄마가 프로그램북을 가리키며 "두 번째로 연주한 곡이 슈베르트였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라는 말로 본인의 감상을 내게 건넬 때, 나는 '그 슈베르트가 써져 있던 피아노 방에서 어설프게 흉내 낸 엄마 싸인을 연습장 속 포도알에 몰래 채워 넣었다'는 말이 목구멍으로 역류할 뻔하여 서둘러 침을 꼴깍 삼켰다.
엄마가 자신의 감상과 함께 가리켰던 리사이틀의 프로그램북은 피아노 문외한인 나에게도 친절한 가이드북이 되어 주었다. 이번 리사이틀 연주 곡에 담긴 이야기는 물론 내게는 다소 생소했던 '게자안다 콩쿠르'가 무엇이고, 오늘의 연주자 일리야 슈무클러의 인터뷰까지 옹골차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1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프란츠 리스트의 '시적이고 종교적인 선율, S.173' 중 7번 장송곡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바로 그동안 피아노 연주를 귀로만 듣는 줄 알았던 지난날의 나에게 일리야 슈무클러가 던지는 메시지 같았다.
프로그램북 속 문장을 빌려오자면 '열정적인 전개가 쉴 새 없이 이어지고 건반 위에서 마치 타들어가는 불꽃들이 마구잡이로 조성을 옮겨가며 에너지를 한없이 쏟아붓는다.'라며 표현된 이 곡은 정말이지 일리야 슈무클러가 건반을 누르는 강약 조절감이 모두 느껴졌다.
낮은 음으로 휘몰아치는 선율에서 인생에서 찾아오는 내면의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었다.
상대와의 대화에서는 언어뿐만 아니라 손짓이나 시선, 표정과 같은 비언어적인 표현 역시 의사소통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일리야 슈무클러는 자신의 온몸을 담아 피아노라는 매개채로 관객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관객들은 그에 상응한 호응과 박수갈채로 대답한다. 준비한 5곡을 모두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끊임없는 박수에 화답하듯 일리야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여러 번 무대로 나와 앙코르 곡을 연주했다.
오늘의 리사이틀이 일리야와 관객, 서로에게 흡족스러웠던 대화로 오래도록 간직되길 바란다.
[백소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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