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달콤 살벌한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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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학생들이 짝꿍과 바꿔서 단어를 채점하는데 전에 없던 구린내가 났다. 세포가 포착하는 냄새랄까. 냄새를 따라 무작위로 시험지를 검사했다.
“스펠링이 틀렸는데 왜 맞지? 단순한 실수?”
“빈칸도 동그라미네? 채점 기준이 바뀌었나?”
“정답 5개가 어떻게 15개가 돼? 장난하니?”
한 둘도 아니고 클래스의 절반 이상이 오답을 정답이라 표시했다. 남아서 재시험을 보지 않도록 학생들이 서로 뒤에서 봐준 것 같았다.
“언제부터 이딴 식이야? 당장 보이는 것만 모면하면 이 짓거리에 익숙해지면 평생 이렇게 산다고. 지금 영어 할 때가 아냐. 책에서 손 떼.”
처음이었다, 죄송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떨구는 등 학생들이 찔린 듯했다. 배신감, 슬픔, 답답함, 안쓰러움 등 여러 감정이 치밀었다. 어려워도 힘들어도 학생이 할 수 있다 믿고 기다리고 가르치고 했던 나의 모든 정성이 하찮게 느껴졌다.
“좋은 점수를 받고 싶으니까 남고 싶지 않으니까 그랬겠지. 그만큼 가정과 학원에서 공부 압박을 느낀다는 뜻으로 보여 마음이 좋지 않아. 그런데 얘들아, 나 지금 매우 허탈해. 화가 나. 이건 거짓이야.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충격이 더 크게 오네. 이 부분은 다시 얘기하자.”
처음부터 채점하고 학원 측에 해당 인원 전부 남아서 재시험 볼 것을 전달한 후 학부모에게도 요약한 문자를 발송하여 지도 협조를 요청했다.
다음 수업 때였다. 단어 시험 후 시험지를 전부 앞으로 거둬서 직접 검사했다. 결석했던 학생들은 상황을 모르기에 선생님이 왜 이렇게까지 검사를 하시느냐며 궁금해했다.
“코로 맡는 냄새 말고 우리 교실에서 구린내가 났어. 썩은 내. 냄새를 따라 가 보니 대부분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더라. 문제 한 개는 괜찮겠지 두 개도 괜찮겠지 하면서 속이고 있었어. 한 번뿐이어도 이렇게 하기 시작하면 습관이 되고 인생이 돼. 그렇게 살지 말라고 거두는 거야. 정신 차리자.”
나에게도 나쁜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 있을 수 있으니 경각하라는 뜻으로 나에게 경고하는 말이기도 했다. 일이 있은 이후에는 수시로 단어 시험지를 검사하면서 전원이 정확하게 풀고 채점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학생들이 이 일을 기억하고 정직하게 살 것이라 믿는다.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지막 수업 날이 덜컥 다가왔다. 끝인 것을 알지만 모두 모르는 척 농담을 던지고 장난을 쳤다. 한 학생이 자신의 폰은 더러우니 앞에 내지 않겠다고 했다. 더러워봤자 얼마나 더럽겠니 괜찮다고 눈짓하며 폰을 집었다. 학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선생님, 그거 제 팬티 안에 있었어요! 더러우니 만지지 마세요!” (꺄, 미쳤어, 웅성웅성)
“그럼 더욱 만져야지. 나 방금 손 씻었어. 내 손이 깨끗해서 네 폰이 정화될 거야.” (일동 정지)
골고루 찬물을 뿌린 후 마지막 진도까지 아낌없이 진행했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간절함이 닿기를 바라면서.
수업 종료 5분 전, 학생들에게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말들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워낙 무뚝뚝하고 표현이 투박한 탓에 말로 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부터 내가 칠판에 쓰는 영어 문장들 천천히 읽고 꼭 이해하고 넘어가. 알겠지?”
Dear my class,
얘들아,
It has been a great pleasure teaching you all.
너희 모두를 가르치는 것은 나의 큰 기쁨이었어.
You would never know how much I love you.
내가 얼마나 너희를 사랑하는지 절대 모를 거야.
Each one of you means a lot to me.
너희 각 사람이 나에게 큰 의미야.
I will remember you and pray for you.
기억하고 기도할게.
Hope you achieve all your goals.
원하는 모든 목표를 이루길.
Be healthy inside and out.
안팎으로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길.
Looking forward to meeting you again.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해.
Hugs,
포옹을 담아.
Y.
문장을 써내려 갈수록 꺽꺽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학생들이 울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참았던 눈물이 나왔다. 학생들을 안아주며 어렵게 이별했다. 첫 만남에서 기싸움하던 학생도, 반항하던 학생도, 장난치던 학생도, 한층 성숙해진 모습으로 이별했다. 사실 난 아직 이별 중이다. 보고 싶다.
돈 받고 가르치는 일이니 잘 가르쳐야 함은 당연하다, 학생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이 월급에 포함되어 있냐 가식 떨지 마라, 학생을 버리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학생을 위한다면 포기하고 학원에 남으라, 다음 행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잘 사는지 보자 등 학부모들의 여러 반응을 받으며 삼켜야 했던 순간들이 있다. 죄송합니다와 감사합니다를 닳도록 반복해야 했던 순간들. 하지만 학생들의 눈물과 이후에도 이어진 문자와 편지가 그 순간들을 씻겨 내린다.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야지.
바람 같은 꿈을 꾼 것 같다. 행복한 부담감이 스민다.
[김윤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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