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각성하지 못한 이들과의 각성 - 각성 [도서]

글 입력 2024.05.0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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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들은 사회의 강제된 규범 속에서 살아간다. 때로는 그 규범에 동의할 수도 있으며,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높은 확률로 그 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강제된 규범에 의한 것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소설 전반에서 에드나가 경험하게 된 ‘각성’을 자신의 욕망에 대한 사회적 재인식 과정으로 정의해볼 수 있다. 각성한 에드나는 자신이 왜 여태까지 남성의 지시에, 가족의 문화에 순종해왔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어서 자신의 각성에 대한 실천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집안 행사는 무시하고 자신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을 답례로 방문하는 일도 집어치웠다. 화가의 꿈을 꾸기도 한다. 작위와 부작위가 교차하는 에드나의 행동을 통해 에드나가 무엇을 자신의 욕망으로 승인하고, 또 무엇을 자신의 욕망을 억압해온 것으로 비판하는지를 독자로 하여금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즉 에드나는 “우주 속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자신이 자기 내면과 주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각성 과정에서 에드나가 자신의 아내 역할을 받아드리는 방법과 어머니 역할을 받아드리는 방법은 상이하다. 아내 역할에 대해서는 분명한 불쾌함을 느끼는 반면 어머니의 역할에 대해 에드나는 단지 불쾌함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체제변화는 외부에서의 부정이 아닌 내부에서의 모순 비판으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에드나가 수행하는 어머니 됨을 더욱 자세히 분석해보자.

 

 

 

“나 자신을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각성 이전에도 에드나의 모성애는 강하지 않다고 묘사되었다. 물론 우리는 이 문장에 대해 ‘도대체 얼마나 모성애가 강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논점은 우선 접어두고, 에드나 자신이 본인을 그렇게 인식했다는 것 자체에만 주목해보자. 각성 이전 에드나는 자신의 부족한 모성애를 그렇지 않아 보이게 하는데 열성이었다. 예를 들어 “무정하고 무심한 엄마로 보이고 싶지 않아” 라티뇰 부인을 따라 필요하지도 않은 바느질을 하기도 했으며 헌신적인 어머니로 묘사되는 라티뇰 부인과 그 아이들을 내심 자세히 관찰하는 장면도 연출된다. 

 

각성 이후에도 에드나가 아이들에게 가지는 애정의 자체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에드나는 더이상 자신의 모성애가 어떻게 연출되는 지에는 큰 관심이 없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이들과의 관계를 보다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느꼈다. 에드나는 이제 자신이 보편적 기준에서 얼마나 모성애가 부족한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감각 그 자체에 더 집중하게 된다. 즉, 아이를 사랑하지만 어머니로서만 살고 싶지 않다라는 두 가지 욕망을 동시에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에드나의 사랑은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사랑으로 묘사된다. 에드나는 이제 자신이 받아드렸던 모성애에 깊은 고찰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회에서 흔히 은폐되길 요구하는 사실도 그저 받아드린다.

 

다만 에드나의 이러한 변화가 모성 자체에 대한 거부는 아님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에드나는 여전히 아들들의 앙증맞은 모습을 보면 감동하는 어머니이다. 아이들과 이별할 때면 마음이 찢어질 듯하기도 하다. 모성이 자신의 일부이면서도 자신이 곧 모성만은 아님을 에드나는 자신의 사랑을 통해 내내 증명해 나간다. 우리는 에드나가 양육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거나 애정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에드나는 자신의 어머니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받고 또 스스로를 의심하는 경험을 한다. 각성 이전의 불안한 모성이야 말로 무엇이 강제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느꼈다.


 

 

현모양처 라티뇰 부인?


 

에드나의 어머니 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티뇰 부인, 그리고 그와의 관계성을 짚을 피룡가 있다. 라티뇰 부인이 현모양처라는 것 자체는 사실이더라도 라티뇰 부인을 에드나의 아내 됨과 어머니 됨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만 묘사하는 것은 한계적일 것이다. 이는 여성의 주체성을 아내 됨과 어머니 됨으로만 편협하게 평가하는 남성적 시각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현모양처’의 삶에서도 주체적 실천과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남편과 아이에게 헌신하는 라티뇰 부인의 삶이 정말로 ‘남편과 아이’에 대한 헌신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만이 허용된 세계에서 여성은 그 구조를 비판할 수도 있지만 허용된 세계에서 최대의 성취를 하고자 노력할 수도 있다. 가정 경영자로서의 여성의 모습에는 종속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도 존재하는 것이다. 퐁텔리에가 아내의 충동적인 행동에서 가장 먼저 우려했던 것은 자신의 체면이었다. 그것은 경제력과 관련된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와 같은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1970-80년대를 거쳐 한국의 산업화는 가족의 형태에도 많은 변화를 야기했다. 산업화 이전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는 대가족이었다면 이제 도시로 올라온 젊은 부부는 핵가족을 구성하게 된다(물론 도시에 거주하는 중산층 가정 중심이라는 한계가 존재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 역시 변화하게 되었는데 이전까지 가정 내 여성의 중심적인 역할이 ‘며느리’ 였다면 이제는 ‘아내’와 ‘어머니’로 이동한 것이다. 여성의 결정권은 여전히 제한적이지만 이 과정에서 최소한 오늘 밥상에 무엇을 올릴지까지 집안 어른의 허락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여성의 지위가 일면 상승한 것은 사실이다. 가부장 중심의 공동체임에도 기본적으로 가족이 부부의 결합체로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제한된 현실일지언정,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을 우리는 쉽게 평가할 수는 없다. 주체는 구조의 희생자만은 아니다.


 

 

‘각성한’ 에드나와 ‘각성못한’ 라티뇰 부인


 

라티뇰 부부와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에드나는 남편이 하는 말 하나하나를 경청하고 맞장구치는 라티뇰 부인의 모습을 보며 “절망스러운 심정”을 느낀다. 그것은 무미건조한 삶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다. 한편 라티뇰 부인도 에드나를 애처롭게 본다. 아이를 낳는 순간에서조차에드나가 어린애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며, 세간의 시선에 대하여 누누이 강조한다. 에드나의 입장에서 라티뇰 부인은 삶의 고차원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고민해본 적 없는 사람이며 라티뇰 부인 입장에서 에드나는 그저 철부지일 뿐이다. 이 둘의 입장을 페미니즘적으로 고민한다는 것은 결코 ‘각성한’ 에드나를 라티뇰 부인을 비롯한 ‘각성못한’ 여성들의 지향점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될 수 없다. 내가 흥미롭게 느낀 것은 에드나와 라티뇰 부인은 많은 부분에서 통하지 않음에도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해간다는 것이다. 친구 됨에 꼭 분명한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겠으나 모성을 중심으로 나름의 연대감이 형성되었다는 해석을 해볼 수 있겠다. 앞서 라티뇰 부인과 에드나가 서사상 대척점에 놓여있는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 주장은 라티뇰 부인과 에드나 각각을 살펴볼 때 보다도 그 둘의 관계성을 고찰할 때 더욱 이해가능한 설명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장면은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에드나와 라티뇰 부인의 논쟁이다. 에드나는 라티뇰 부인에게 자신은 자녀나 그 누구를 위해서도 희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희생하지 않겠다는 것은 돈이나 목숨과 같은 비본질적인 것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임을 후술한다. 라티뇰 부인은 “하지만 여자가 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으면 된 것 아닌가요. 성경에도 그렇게 쓰여 있고요. 나도 그 이상은 못 할거예요.”라는 말로 응수한다. 

 

이 장면은 모성에 대한 에드나의 각성된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명하지만, 실제로 더 흥미로웠던 것은 라티뇰 부인의 반응이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지점을 흥미롭게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문제적으로 들릴만한 주장을 에드나가 라티뇰 부인에게 할 수 있을 만큼 둘 사이의 합의된 신뢰의 선이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둘이 서로 ‘외계 언어’를 쓰는 것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표현되었지만 제3자인 독자가 텍스트로 확인하기에는 결국 두 사람이 말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라티뇰 부인은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냐 따져 묻는다. 신실한 라티뇰 부인에게 본질적인 것은 생명이다. 그래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것이 된다. 에드나는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가 본질이다. 그래서 목숨까지는 바치더라도 자기 자신을 바치지 못한다는 설명이 성립된다. 이것이 단순히 본질에 대해 고민한 적 없는 라티뇰 부인의 무지로 해석해야 할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에드나는 각성을 통해 자신이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획득한 상태이다. 동시에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까지는 내놓을 수 있다 말한다. 라티뇰 부인은 그 이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까지 구체적인 언어가 있는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나도 그 이상은 못 할 것’이라고 하며 생명 이상의 자신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이 둘은 통하지 않는 듯 하면서도 결국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두 번째 장면은 에드나가 로베르와 재회 직후임에도 산통이 시작한 라티뇰 부인에게로 간 장면이다. 4번째 출산임에도 라티뇰 부인은 마음을 놓지 못한다. 또한 출산 과정은 아름답게 각색되지도 않는다. 에드나는 둘러댄다면 충분히 둘러댈 수 있었으나 멍한 상태로나마 라티뇰 부인의 곁을 지킨다. 이미 출산을 경험했음에도 라티뇰 부인의 출산 과정을 생경하게 바라보는 에드나의 모습은 네 번째 출산임에도 여전히 두려워하는 라티뇰 부인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는 다시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는 출산이라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럽다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개별 여성의 경험에 있어 전혀 자연스럽지 못한 경험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다른 하나는 어머니 됨이 단지 남성 세계에서 강요된 역할 수행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연대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이 생긴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한다. 출산의 과정이 나옴으로써 두 인물의 주체성은 더욱 강조된다.


 

 

의무가 아닌 권리로서의 모성을 향하여


 

‘여성’이 ‘남성’과 구별되는 가장 큰 부분은 아이를 생육할 수 있는 재생산 능력이다. 능력으로 표현했지만 여성이 인간 재생산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억압의 근거가 되어왔다. 근대까지는 여성은 아이를 낳기 때문에 가정에 머물러야 하는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였다, 현대에는 아이를 안 낳으면 이기적인 것이 되지만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고용시장에서 불이익을 경험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성찰해야하는 것은 여성이 남성과 같은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재생산 과정이 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개인의 선택으로 인정받을 필요는 있겠으나 임신, 출산 자체에 대한 거부가 지향해야할 대안은 아니지 않는가. 근대 이전처럼 노골적으로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법에 명시하지는 않지만, 재생산권에 대한 보장 없는 세상에서. 여성은 ‘자연적으로’ 열등해진다. 

 

그렇다면 모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왜곡된 모성에 대한 비판은 모성 자체를 거부함으로서 획득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적 통찰에도 어긋난다. 아이를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어머니 됨에 답답함을 느끼며 자녀와의 관계를 정립해 나간 에드나를 생각하자. 재생산 능력과 이에 기반한 모성이 권리로서 보장되는 세상에서 에드나가 자신을 부족한 엄마로 자책하게 되는 순간이 한순간도 없기를 바라본다.

 

한편 강제된 모성에 대한 의무를 비판하고 거리를 둘 수 있는 조건은 그의 계급에서 근거함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흑인 하녀”, “혼혈 보모”와 같이 인종화되고 계층화된 여성 인물들은 에드나의 각성 옆에서 묵묵히 일을 한다. 사실 에드나가 다른 데에 집중해도 가정 관리가 최소 수준으로는 유지가 될 수 있는 경제적 환경이었기에 각성이 가능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수영을 배울 수도 없고 누가 대신 가사 일을 해주거나 남편으로부터 충분한 생활비를 조달받을 수도 없는 “흑인 하녀”와 “혼혈 보모”의 각성은 어떻게 가능할지, 한 책에서 모든 답을 할 필요는 없지만 고민으로 남길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하나의 세계의 시작은 필연적으로 모호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극도록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 이전의 세계를 부정하지는 말자. 하나의 세계를 연 사람은 그 이전 세계에서도 적극적 주체였음을 잊지 말자. 많은 시간이 흐른 다른 땅이지만 어머니 됨은 그 자체로 여전히 징벌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 됨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어떤 모성이 필요한지 우리가 답을 해나가자. 때때로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으며 또한 때때로 아이를 양육하거나 양육하지 않으며. 이 기억들을 가지고 다음 세계의 문을 열자.

 

 

[진세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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