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공존의 투데이를 찾아서 - 연극 '천 개의 파랑' [공연]

경계 너머의 연대와 휴머니즘
글 입력 2024.05.16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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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가변형 극장을 ‘블랙박스’형 극장이라 부른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상자를 닮은 블랙박스형 극장 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객석을 놓는 위치와 방향 모두 자유이다. 지난 4월 16일부터 28일까지 연극 <천 개의 파랑>(천선란 원작, 장한새 연출, 김도영 각색)이 공연된 홍익대 아트센터 소극장 역시 블랙박스형 극장이다.

 

‘블랙박스’라는 명칭으로부터 연상되는 의미는 하나 더 있다. 자동차나 비행기의 주행 기록장치이다. 이 블랙박스 무대 위에 펼쳐지는 것 역시 경마장의 기수 로봇, ‘콜리’에게 저장된 속 기억들이다. 국립극단의 창작자 지원 프로그램, ‘창작공감: 연출’을 통해 제작된 연극 <천 개의 파랑>은 2019년 한국 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거리와 편의점, 경마장에까지 로봇이 상용화된 근미래, 경주마처럼 숨찬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 앞에 인간은 자신의 효용가치를 인정받으려 고군분투해야만 한다. 오늘날에도 전혀 낯설지 않은 그 씁쓸한 상황 속에서, 작품은 소외된 존재들의 연대에 주목한다. 연극은 인물들 간의 ‘공존’과 ‘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춘 원작 소설을 충실히 따라간다. 그렇게 관객에게 인간 사이의 구분과 위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한 고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진정한 발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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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인물들은 각자의 결함을 가졌고, 사회에서 자신의 ‘쓸모’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할 상황에 놓였다. 오로지 경마에서 인간보다 빠른 속력을 내도록 제작된 기수 로봇 콜리는 제작상의 실수로 인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자신과 호흡을 맞추던 경주마 ‘투데이’를 구하기 위해 낙마를 선택하고, 하반신이 부서져 폐기 위기에 놓인다. 식당을 운영하는 보경은 과거 남편을 잃은 때의 기억으로 현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그의 첫째 딸 은혜는 하반신이 마비되었지만 경제적 이유로 인해 구식 휠체어를 탄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지켜보며 자란 은혜의 동생 연재는 로봇을 다루는 데 천재적이지만 기술 발전의 궁극적인 이유를 찾지 못해 자신의 재능을 사회로부터 단절시킨다.

 

인물들의 사회적, 경제적 계급만큼이나 그들이 바라보는 시간도 명확하게 구분된다. 인정받고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들은 미래의 전망을 내다보며 변화를 빠르게 수용한다. 그리고 과거의 풀지 못한 상처들로 얼룩진 세 식구, 보경, 은혜, 그리고 연재는 이용하는 기술의 측면에서도, 심리적 측면에서도 과거를 바라보고 있다. 앞서나간 미래와 뒤처진 과거밖에 없는 세상에서 미래를 보는 이들은 경주마처럼 달려가기 바쁘고, 과거를 보는 이들은 너무 느린 탓에 경기 트랙에서 열외 된다. ‘구식’이 된 휠체어를 사용하는 은혜는 그보다 발전된 기술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인해 휠체어를 고려하지 않는 환경 속에 일상의 자유를 잃었다.

 

그러한 상황에 희생되는 것은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재’라는 시간이다. 극 중 무리한 경기로 인해 다친 경마장의 말 이름이 ‘오늘’을 뜻하는 ‘투데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투데이의 안장 위에서 달리는 이는 과거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지금’을 판단하는 로봇 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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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은 콜리와 투데이가 트랙을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관계를 회복한다. 과거 끝에 마주한 현재를 관객이 '감각'하게끔 하기 위해 극중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활용한 것이 인상 깊다. 극장과 연극은 검은 벽과 암전 속에 관객이 사는 현실의 시간과 배경을 끊어내고 극 중 사건에 대한 몰입을 유도한다. 하지만 작품은 의도적으로 객석등을 켜고 ‘이 곳은 극장이며 이 모든 것은 연극이다’라는 사실을 드러낸 채로 극의 시작과 끝부분을 진행한다. 관객들이 자신의 현재에서 콜리가 기록한 과거의 순간들로, 그리고 또다시 자신의 현재로 돌아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이 중요시하는 건 단지 ‘현재’라는 요소뿐만이 아니라 ‘관객 자신만의’ 현재이다. 콜리와 투데이의 느리게 달리는 경주가 진행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석을 실시간으로 촬영하여 무대 뒤편에 송출함으로써 경마장의 관객처럼 기능하게 하는데, 이는 무대 위 이야기와 관객의 삶을 이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또한 ‘투데이’를 구체적 형상 없이 빈공간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표현한 것도 관객이 자신만의 ‘오늘’의 존재를 떠올리고 스스로 조명 아래를 채우며 관람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적극적 경험을 거쳐 다시 돌아온 관객의 ‘현재’는 공연 이전의 ‘현재’와 절대 같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전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작품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로봇의 사용이다. ‘콜리’ 역할의 경우 로봇과 사람 배우가 함께 연기하는 형태이다. 이는 아마 누군가는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아니라는, 지극히 권위적인 시각의 구분을 흐리고 공존에 대한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풀어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봇은 수동적으로 놓여있는 ‘퍼펫’과 같은 기능 외에 아무런 극 중 역할을 하지 못한다. 공존을 이야기하지만 무대 위에서 활동하고 상호작용하며 상황을 만드는 인간들 사이에 로봇은 자리하지 못한다. 무대 위 등장한 로봇 콜리는 사람 배우와 달리 ‘인간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감정표현’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대에 존재하는 것 외에 핵심적인 일을 담당하지 못한다. 이는 오히려 존재의 비인간으로서의 소외를 심화시키는 모순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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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넘어 가상 현실까지 고도로 발달되고 있는 시기에 연극이란 참 아날로그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은 자신의 생각과 몸을 그대로 가져다가 대본에 있는 타인의 입장이 되어 보려고, 타인의 말을 해 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관객 역시 무대 위에 펼쳐지는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기꺼이 극장이라는 곳으로 먼 길을 간다.

 

하지만 그 아날로그적인 만남의 노력은 <천 개의 파랑> 속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하던 과정과 맞물려 뭉클함을 낳기도 한다. 연극은 막을 내리고 그 실체는 사라지지만, 모든 만남은 각자의 블랙박스 안에 남아 매 순간의 현재와 미래에 조금이라도 관여할 것이다.

 

 

[박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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