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대화는 삼킴과 구토다 [영화]

글 입력 2024.05.0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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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오랜 불통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해소하지 못한 가장 큰 과제는 소통의 어려움이다. 일상에서는 보통 대화의 방식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데, 대화는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마주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다. 형식상의 조건을 달성하기는 이렇게도 쉽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 생각을 공유하며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대화를 통해 합의가 이루어져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듣는 일은 생각보다 지루하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중간 지점에서 합의를 마련하기도 성가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류 역사상 실패한 대화는 수도 없이 많고, 그 결과로 여러 사건을 발생시키며 발자취를 남겼다.

 

동부 유럽 최고의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손꼽히는 체코 출신 감독, 얀 슈반크마이에르Jan Svankmajer 또한 인류의 오랜 과제에 관심을 보였다. 슈반크마이에르는 애니메이션의 연금술사라 불리며, 체코의 퍼핏 애니메이션(인형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한 장면씩 촬영하여 움직임을 만드는 애니메이션)을 계승한 초현실주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감독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체코의 초현실주의 예술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1968년 소련에 의한 침공과 ‘프라하의 봄’이라고도 불리는 체코의 민주화 운동을 겪으면서 그는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현실에 비판적인 시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예술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그는 체코의 실상을 고발하는 작품을 여럿 제작했는데, 체코 사회의 절망을 표현한 <방(The Flat)>, 체코인의 삶과 정치관을 다룬 <레오나르도의 일기(Leonardo’s Diary)> 제작을 계기로 7년간 영화 제작 금지 처분을 당하고 말았다. 그 기간동안 그가 시도한 여러 예술적 실험이 집약된 작품이 <대화의 가능성>이다.

 

<대화의 가능성>은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다양한 관계의 대화를 은유적인 오브제와 움직임을 통해 표현한 작품이다. 이를 통해 슈반크마이에르는 부조리한 상황, 인간 소외 및 관계의 상실, 관료화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로 담아내었다. 오늘은 3부작 중 첫 번째, <영원의 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슈반크마이에르가 지적하는 대화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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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가능성(Dimensions Of Dialogue, 1983)>


 

작품 속에는 세 형상이 등장한다. 채소와 빵으로 만들어진 인간 형상 하나, 수저와 국자, 냄비 뚜껑 등 주방기구류로 만들어진 형상 둘, 책과 삼각자 등 문구류로 이루어진 형상 셋이다. 작품 속에 현실을 반영하는 감독의 특성을 고려하면, 세 형상은 각각 농민, 노동자, 지식인 계층을 가리키는 표상이다.

 

첫 장면에서는 채소로 만들어진 인간과 주방기구로 만들어진 인간이 마주보고 다가온다. 두 인간이 가까이 다가와 마주서자, 별안간 주방기구 인간이 입을 벌리더니 채소로 만들어진 인간을 한입에 집어삼킨다. 그는 냄비 뚜껑과 가위, 칼을 들이밀고선 채소 인간을 구성하는 양배추와 달걀, 빵을 마구 난도질하더니, 작게 조각난 채소 인간을 다시 토해낸다. 장면이 전환되어 이번에는 주방기구 인간과 문구 인간이 마주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문구 인간이 입을 벌려, 책과 연필, 물감 등으로 주방기구를 마구 망가뜨린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벌리고 난도질당한 주방기구 인간을 토해낸다. 그리고 또다시 장면이 전환된다. 이번에는 문구 인간이 채소 인간과 만난다. 두 인간이 마주한 순간, 채소 인간이 입을 벌리더니 상대를 먹어치운다. 그리고는 책과 종이봉투를 갈가리 찢어버린다. 그는 충분히 마음에 찰 만큼 문구 인간을 망가뜨린 뒤 다시 토해낸다. 문구 인간도 어김없이 망가져 조각나고 말았다.

 

이렇게 서로를 먹고 토해내는 장면이 다시 반복된다. 먹고 먹히는 관계는 처음의 대화와 동일하다. 이번에 집어삼켜진 인간들은 아주 고운 가루로 분해되어 다시 토해 내졌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대화가 시작되고, 이번에도 상대를 먹었다가 뱉어내고 보니 모두가 점토로 만들어진 인간이 되어있었다. 채소 인간과 주방기구 인간, 문구 인간은 모두 점토로 빚은 인간의 얼굴이 되어 기존의 형상이라곤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는 모두가 점토 인간이 된 상황, 마지막 장면에서 오른쪽에 있는 존재가 반대편의 알 수 없는 존재를 집어삼키자, 이제는 왼쪽만을 바라보는 점토 인간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산된 점토 인간이 또다시 왼편을 바라보는 점토 인간을 토해내고, 새로 만들어진 인간은 자신의 복제본을 또다시 생산해내며 결국 한쪽만을 바라보는 점토 인간의 굴레로 작품은 막을 내린다.

 

 

 

식사와 구토, 우리의 대화


 

본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대화의 가능성>으로, 대화의 불통이 발생하는 여러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때 대화 시 발생하는 문제점은 작품 속 인물들의 행위로 비유된다. 그중 1부작 <영원의 대화>는 농민과 노동자, 지식인 계층 간의 소통을 상징한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대화는 오직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상대를 집어삼켜 잔혹하게 해체한 다음, 산산조각 난 형태로 뱉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두 양상은 대화가 지닌 일방성과 폭력성을 암시한다. 즉,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화하기 위해 마주앉았음에도 상대의 주장을 찍어 누르고 집어삼켜 자신의 뜻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려는 행태를 가리킨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외부의 집단을 만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파(派)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한다. 이는 상대가 협조하지 않을 시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협박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다른 분야에서의 전문성 또는 높은 지위를 들먹이면서 일말의 반박도 꺼내지 못하도록, 자신들의 논리로 상대를 찍어 내리는 효과를 의도하여 일어난다. 우리의 논리가 완벽하므로 상대도 동일하게 납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대화는 양방향적인 소통이다. 단번에 의견이 수용되리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주 오만함에 차서 잘못을 저지른다. 이러한 탓에, 상대가 자기 측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박을 들거나 말을 덧붙이면 심각한 무례를 당한 것처럼 분노하며 몰아세우곤 하는 것이다. 말다툼이 격해지면 대화의 장은 칼바람이 부는 살얼음판이 된다. 이제는 일분일초 생사의 사투를 벌이는 전쟁터에 선 것 마냥, ‘당신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한다’는 태도로 무지성적 비방과 매도가 난무하게 된다. 여기에 설득과 타협이 낄 자리는 없다. 심지어 상대에 대한 몰이해와 격해진 감정으로 인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설명은 훨씬 부족해진다. 오로지 우리 쪽의 재산, 계층, 기세를 무기로 삼아 서로를 찍어 내리고 자신의 뜻에 함락하게 만들려는 대화의 특성만이 도드라진다. 이러한 대화의 양상은 작품 속에서 대화 상대를 먹어치우고 작게 분해하는 것으로 상징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증이 떠오른다. 애니메이션의 세 인간은 어째서 먹어치운 상대를 다시 토해냈을까? 오히려 먹은 만큼 소화시켜 몸집을 불리는 쪽이 훨씬 상식적으로 느껴지는데 말이다. 상대를 차마 목구멍으로 삼킬 수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 형상, 그러니까 세 계층이 너무도 이질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통 상황에서 그들이 서로의 차이점을 더욱 극명하게 조명하며 스스로를 상대로부터 분리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화라는 이름의 전쟁터에 오른 것은 각자의 요구를 관철해 쟁취하기 위함이다. 서로를 경계하고 감시할수록 상대를 향한 적개심과 거부감은 극에 달하게 된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대화 상대가 자신들과 절대 섞일 수 없는, 별개의 존재들이라며 선을 그어버리고 남아있는 화합의 가능성조차 차단해버린다. 내부가 똘똘 뭉쳐 천하무적이 되는 만큼, 외부의 적은 확실한 천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어쩌면 각 계층은 같은 공감대를 공유하며 일부 일치하는 주장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적으로 인식되어버린 상대방에 대한 거부감이 앞서서 그것을 차단해버린다. 이러한 이유로 상대방을 자신의 주장으로 찍어 내리고 한입에 집어삼키더라도, 마침내 목구멍 너머로 삼켜내지는 못하고 다시 토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주 잔인하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산산조각 부서져 힘을 잃으면 더 이상 자기들의 주장에 토를 달지 못하도록.

 

이렇게 상대를 먹어치우고 망가뜨린 뒤, 다시 토해내는 방식의 대화로 인해 세 계층, 더 넓게 우리 인류는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한 포용력을 잃고 만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섞이거나 마침내 삼켜내 본인들의 편으로 포섭하지도 못한 채, 무지성적으로 마구 먹어치우고 토해내기만 반복할 뿐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영양가 있는 대화의 경험이 상실되고 만다.

 

 

 

영원히 돌고 도는 식사의 굴레


 

잠시 여기서 인물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에 주목해보자. 농민을 집어삼키는 노동자는 지식인 계층에 먹히고, 지식인은 다시 농민에게 집어삼켜지며 대화가 반복된다. 자신을 압도하던 상대를 먹어치운 존재가 되돌아와 자신의 식사가 되는 것이다. 한 계층의 역할이 순식간에 전환되고, 서로를 집어삼키고 토해내는 관계는 이렇게 순환한다. 결과적으로, 세 계층 중 그 누구도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존재는 없는 것이다.

 

이때 농민이 지식인 계층을 먹어치운다는 관계 설정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두 계층이 지닌 사회적 지위와 재산, 지식의 차이만 비교해 보아도 지식인 계층이 농민 계층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감독의 통찰이 숨어있다. 채소와 빵 등 음식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농민 계층을 상징한다는 것에 힌트가 있다. 아무리 지식인들이 고귀하고 잘난 척 떠들어대도, 다른 계층과 차별되는 별세상 음식을 먹는 것은 아니다. 지식인들이 먹는 음식은 농민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공급되는 것이기에 농민들은 지식인들의 삶에 아주 중대한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작품 속 먹고 먹히는 관계는 한 쪽이 다른 쪽을 입 다물게 하고 착취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삶에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계층은 서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수 없다. 한 계층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계층의 노동과 지식이 필요하다. 농민이 쌓아온 생활의 지혜를 발휘하여 작물을 생산해냄으로써 음식을 공급해주어야 하고, 노동자는 윤택한 삶을 보조하는 상품을 만들어내야 하며, 지식인은 새로운 철학을 주창하고 법과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각 계층이 사회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다른 계층이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역할로, 이러한 역할이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사회가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더욱 발전할 수 있다. 각각의 역할이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에서 필요한 여러 역할을 나누어 맡고 있는 덕분에 모든 개인의 삶이 균형 있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한 계층의 기여가 중단될 경우, 사회적 균형이 무너지고 모든 계층에 일정한 위협이 발생하게 된다. 요컨대 세 계층은 서로의 삶에 매이는 목줄을 쥐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이 작품 내에서는 먹고 먹히는 관계의 순환으로 상징되었다.

 

 

 

포상은 가슴 속 앙상한 가시나무


 

여러 차례 서로를 집어삼키고 토해내고 나니, 작품 속 세 형상은 서로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모두가 점토로 만들어진 형상이 되어서 상대를 마주한 것인지 거울 속 자신을 마주한 것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다. 껍데기는 사라지고 본질만 남았다.

 

대화의 시작 단계에서는 계층별 특유의 차림새와 말투, 몸가짐으로 사람들이 구분될 수 있었다. 그때는 겉모습만으로도 우리 편과 적을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대화가 시작되고 말싸움이 무르익자, 그들은 하나둘 서로의 갑옷을 들추기 시작했다. 추레한 옷, 고단한 노동의 흔적, 기품 있는 행동과 같이 각 계층을 설명하는 베일이 한 겹씩 벗겨졌다. 그렇게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집단을 구분 지으며 상대를 위협하는 멋진 갈기가 되어주던 베일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들의 신념을 포장하던 껍데기는 사라지고 대신 초라한 욕망만이 남았다.

 

감독이 말하고 싶던 바는 간단하다. 서로를 잡아먹는 대화가 거듭될수록, 우리를 멋스럽거나 불쌍해 보이도록 포장하던 겉모습이 거두어지고 속된 욕망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점토로 된 피부를 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속한 계층은 달랐을지언정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상대를 가차 없이 짓밟으려 했던 본질은 동일했음을 깨닫는다. 여러 겹으로 차려입어 숨겨져 있던,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탐욕이 모습을 드러낸다. 타인의 치부를 까발리고 거짓을 일삼아서까지 더 큰 것을 탐하려던 욕망은 모두 같았다.

 

그럼에도 비밀스러운 날 것의 욕망이 드러나도 지긋지긋한 싸움은 멈추지 않는다. 도리어 이제 그들은 소통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등을 돌리게 된다. ‘저들은 이야기해도 안 될 사람들이야’라면서 괜한 노력 따위 필요하지 않다는 핑계를 주장한다. 그 반동으로 집단 내부에서의 대화가 활발해지고 말은 그 안에서만 돌고 돈다. 그리고 서로가 듣기 좋은 소리, 자신의 편에 유리한 입장을 주장하며 수많은 추종자를 만들어낸다. 분명 처음에 세 집단의 대화는 한 점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시작되었으나, 서로가 등을 돌리고 대화가 차단되면서 추종자들의 행렬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세 갈래로 나뉘고 말았다. 왼쪽을 바라보는 인간들만 거듭 생산되며 작품이 끝을 맺었듯이, 이제는 각자가 앞만 보고 나아가며 돌이킬 수 없는 세 갈래 길이 만들어졌다.

 

슈반크마이에르 감독은 이런 것을 꼬집고 싶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계층, 혹은 별개의 집단에 속한 사람들 간의 대화가 지닌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오로지 상대를 집어삼키거나 자신이 삼켜지는 것이 전부인 대화, 그리고 그 결과로 서로의 탐욕스러운 욕망만이 드러나게 되는 원인을 꿰뚫었다. 대화를 통해서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실된 소통과 합의를 원한다면 상대를 어떤 존재로 여겨야 하는지의 문제가 <대화의 가능성>의 후속작이 될 것이다. 이제는 각자만의 후속작을 만들어야 한다.

 

 

 

대화의 불가능성과 영원한 가능성


 

작품의 끝은 영원한 불통으로 막을 내린다. 사실상 영원한 소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화라는 명분을 띄고 상대를 먹어치우듯 위협하는 갈등만이 영원했다. 대화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며 애니메이션은 막을 내렸다.

 

심오한 주제를 담은 날카로운 지적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기에 감독의 뜻은 무엇보다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상대의 주장을 찍어 누르고 치부를 드러내며 논리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욕망. 대화의 불가능성을 만드는 것은 이러한 욕심들이다. 누가 잘났고 못났고의 문제에 앞서,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가려는 자세의 부재가 불통을 만든다.

 

그러나 감독은 분명한 희망의 바람을 불어넣어준다. 그는 인간의 소통 방식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이미 꿰뚫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작품 속에서도 분명한 가능성을 남겨주었다. 소통 중에 겪는 여러 문제의 양상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이러한 자세를 고쳐 앉는 것에서부터 가능성이 열린다고 그는 말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 그러니까 상대방의 표정이나 차림새, 지위나 재산과 같은 것들은 대화의 방해물이 아닐 수 있다. 도리어 상대에 대한 거부감, 우리 주장을 단연코 관철시켜야만 되겠다는 이기심이 소통을 어렵게 만든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건전한 대화의 태도를 지닌다면, 서로의 이질성은 또 다른 결과를 꿈꾸게 하는 발판이 된다. 진정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가로막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안에 있었음을 깨달으며, 감독을 이어 자신만의 <대화의 가능성> 후속작을 마련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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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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