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아직까지도 굳이 손글씨를 고집하는 이유

아이패드와 애플펜슬 없는 삶
글 입력 2024.05.0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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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Unsplash, Angelina Litvin

 

 

1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고, 2014년도 그다지 먼 과거가 아니다. 하지만 바뀐 시대를 감지한 작은 습관들이 변화하기엔 충분한 세월이다. 내게도 10년 전과 지금 현재 사이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습관이 하나 있다. 바로 ‘쓰기의 방식’이다. 많은 이들의 개인사에서 글씨 쓰기란 공부의 행위와 맥을 함께한다. 그렇기에 쓰기의 변화를 돌아보기에 앞서 공부 방식의 변화를 되짚어 보면, 필기구 - 키보드 -디지털 펜슬 순의 변화였던 것 같다.

 

학창시절, 교실에서 허용됐던 필기도구는 공책과 필통이 전부였다. 야간 자습 시간이 되어서야 인터넷 강의를 듣는 용도로만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자 거의 모두가 수업 시간에 노트북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내가 졸업반 즈음이 되자 디지털 펜슬과 태블릿 PC의 액정이 부딪히는 소리로 바뀌었다. 졸업한 이후의 현재 시점까지도 주변에서 태블릿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을 찾아보기가 드물다.


하지만  내 쓰기의 방식은 지금까지도 아직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공부를 할 때는 강의자료에 필기 내용을 덧붙여 텍스트 파일을 만들었고, 내용을 익힐 때는 손을 움직이며 종이 위에 반복해서 적었다. 지금처럼 글을 쓸 때는 또 순서가 달랐다.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낙서하듯 종이에 옮긴 후 컴퓨터를 켜서 차근차근 줄글로 정돈했다. 이렇듯 쓰기의 목적에 따라 활자와 손글씨의 순서는 유동적이었지만 그 틈에 ‘디지털 손글씨’는 끼어든 적이 없었다. 내가 여전히도 그 진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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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Unsplash, Kelly Sikkema

 

 

내게는 구태여 디지털 손글씨를 택할 이유가 없었다. 파일 형태로 저장한다면 자판으로 입력한 활자가 효율성을 따졌을 때 훨씬 나았다. 손글씨가 파일화되면 텍스트 인식이나 검색 등의 기능을 활용할 때 한계가 있었고, 가독성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도식이나 기호를 사용할 때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가장 빠르고도 정돈되게 글자를 입력할 수 있는 자판의 편리성 앞에서는 충분히 용인할 수 있었다.

 

뭔가를 직접 손으로 써야 할 때도 디지털 펜슬보다는 종이와 펜이 먼저였다. 물론 노트 어플리케이션에는 나에겐 없는 갖가지 펜이나 브러시 기능이 넘쳐났고, 종이 느낌을 구현한 액정 필름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섣불리 마음이 가지 않는 이유는 확고했다. 이미 종이와 펜이라는 모태가 있는데 굳이 왜? 어차피 파일 형식의 확장자라면 활자가 훨씬 기능적이고, 손글씨라면 실제 종이의 질감과 실제 펜의 필압을 완전히 따라할 수는 없다.

 

또 한 가지 더, 내게 쓴다는 행위의 의미는 전적으로 ‘흔적 남기기’에 있었다. 내게는 글의 존재감이 유독 중요했던 탓이었다. 디지털 문서로는 그 존재감이 대체될 수 없었다. 기록물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내용의 위치, 즉 순서다. 그 흐름이 디지털 문서에서는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온라인 문서를 정독할 때 굳이 인쇄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손으로 작성한 노트를 디지털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단순한 장기 보관을 위해 디지털 매체의 이점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다. 반면 전자는 비물질 매체의 한계를 보완해 감각적인 인지를 돕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그 목적의 무게 자체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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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Unsplash, Jan Kahánek

 

 

이 글을 쓰며 흔하디흔한 '아날로그 감성' 같은 표현은 접어두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돌고 돌아 이 주제로 글을 맺게 된다. 결국 손글씨의 가장 큰 이점이라면, 종이가 물질적인 도구라는 사실이다. 디지털 활자든 디지털 손글씨든, 데이터값으로 변환된 글자들은 수정도 삭제도 손쉽다. 잘못 적은 오타나 잘못 그어 엇나간 획도 백스페이스 키나 뒤로가기 단축키를 누르면 쉽게 돌이킬 수 있다. 그렇기에 문서화된 파일은 대부분 최종적으로 균질한 상태를 추구한다.

 

반면 종이는 모든 획을, 또 실수마저도 전부 포용하고 그 흔적을 고스란히 표면 위에 남겨둔다. 내가 중시하는 '흔적 남기기'로서의 글에서 흔적이란 단지 내용만을 칭하지 않는다. 그 기록을 남길 당시의 감정까지도 속한다. 펜이 지나간 흔적에서는 순간의 심리 상태가 곧이곧대로 전달된다. 당시의 감정을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적은 글자를 보면서 떠올릴 수 있다. 휘갈긴 글씨에서 급박한 열의를, 눌러쓴 글씨에서 신중한 고민을, 여러 차례 그어댄 밑줄이나 동그라미에서 미심쩍은 의문을 본다.

 

이렇게 너무나도 쉽게 어떤 한 순간의 생각과 감정을 남겨둘 수 있다는 점이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종이와 펜을 찾게 만든다. 그래서 난 앞으로도 당분간 태블릿이 아니라 공책과 필통을 챙길 예정이다. 알 수 없는 언젠가, 뭔가 다른 이유가 생겨 디지털 손글씨를 받아들이는 때가 오더라도 가장 편안한 도구가 종이와 펜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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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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