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누군가의 봄을 영영 앗아간,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 연극 짬뽕

글 입력 2024.05.15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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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한 중국집 춘래원. 봄이 오길 기다린다는 뜻을 지닌 가게 이름처럼, 춘래원의 주인 신작로는 소박하지만 단란하고 행복한 자신만의 봄을 기다리며 열심히 살아간다. 그는 매일 자신의 통장을 들여다보며 딱 150만 원만 더 모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 150만 원은 애인 오미란과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여동생을 챙기며, 자신이 친동생처럼 여기는 춘래원의 배달부 백만식에게 좋은 옷 한 벌을 해주기 위해 필요한 돈이다. 그의 봄은, 그의 가족, 그리고 그가 가족처럼 여기는 춘래원 식구들과 언제까지나 화목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들만의 소박한 봄을 꿈꾸며 열심히 삶을 일궈가던 그들의 평범했던 일상은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처참히 무너진다. 연극은 군부의 무자비한 시민 진압과 시민과 군인의 대치 상황으로 초래되는 광주 시내 곳곳의 혼란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춘래원이라는 그들의 일상적 공간에서 펼쳐지는 일들로 관객이 그 상황을 짐작하게 만든다.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달되는 뉴스 방송은 점점 살벌해지고, 가게 문을 열면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며, 잠시 바깥에 나갔다 온 춘래원 식구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믿기지 않는 장면들을 전한다. 연극이 당시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전달해 주지않는다 해도, 5월의 광주를 알고, 기억하는 관객들은 그들이 꿈꾸는 안온한 일상, 그들의 봄이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 중에서, 연극 <짬뽕>은 당시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소시민의 삶을 조명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들은 대단한 신념이나 투쟁 의지도 없으며, 당시의 부조리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간첩이니, 빨갱이니, 폭도니 떠들어대는 뉴스 방송을 들으며 ‘뉴스가 설마 거짓말을 하겠냐’고 말하고, 어이없게 군인과 엮여버린 상황에 겁을 먹는다. 자신의 평범한 일상이 무너질까 두려운 주인공 신작로는 도청에 있는 학생들에게 커피를 배달하는 애인 오미란에게 함부로 바깥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말하며 화를 낸다. 이러한 일화들은 춘래원 식구들이 그저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이들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는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그들의 일상과 그들이 꿈꿨던 평범한 ‘봄’을 영영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비극성을 더한다.

 

 

연극[짬뽕] 본문 사진.jpg

 


배달부 백만식은 음식을 배달하던 중 두 명의 군인과 마주친다. 군인들은 그가 지니고 있던 음식들을 빼앗으려 하고, 그는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군인 한 명에게 부상을 입히는데, 이후 ‘간첩이 군인을 공격했다’는 식의 뉴스를 듣는다. 백만식은 그것이 자신에 대해 군인들이 꾸며댄 이야기라 확신하며 방송사를 찾아가 사실을 바로잡겠다고 소리치고, 백만식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신작로는 자신이 간첩을 숨겨주었다는 혐의로 고문을 받을까 두려움에 떤다.

 

연극은 사실을 바로잡겠다는 백만식과, 그를 저지하는 신작로의 갈등을 꽤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그를 해쳤던 군인들이 춘래원에 찾아와 식사를 하는데, 신작로와 백만식은 군인들을 제압하고,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총까지 빼앗으며, 신작로는 그들을 죽이려고까지 한다. 백만식은 극 내내 자신이 군인을 해치지 않았고, 도리어 군인들이 자신에게 부당한 요구를 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했고, 신작로는 군인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과 공포를 드러내며 그들과, 또 혼란스러운 당시 상황과 어떻게든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한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군인을 해치고, 협박하는 상황이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군인이 시민을 공격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바깥의 상황과, 그 상황에 연루돼 자신의 일상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이 신작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이해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 특히 군인들을 죽이려고까지 하는 신작로의 행동을 관객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선 그가 갑자기 마주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얼마나 피폐해지고 비이성적으로 변해갔는지를 충분히 보여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극 내내 펼쳐진 어떤 일화에서도 그가 그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의 일상을 위협하는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이 결국 자신들의 음식을 갈취한 두 군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담아내지 못했다.


작품이 당시 소시민의 삶에 주목하는 것처럼, 극에서도 짬뽕을 둘러싼 군인들과의 갈등보다 춘래원 네 식구의 삶을 더 담아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연극은 주인공 신작로의 성격과 그가 춘래원이라는 가게를 시작하고 자리 잡기까지 치열했던 삶, 또 그가 이루고자 하는 소박한 소원 등을 그의 입을 통해 전달한다. 하지만 신작로를 제외한 춘래원 식구들의 개인적인 삶, 즉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는 적다고 느꼈다.

 

극을 보면서 궁금했던 지점은 군인들과의 짬뽕 소동의 전말이나 전개가 아니라, 춘래원 식구들의 이야기, 그들 각자에게 부여된 설정에 대한 서사였다. 가령 신작로의 동생 신지나는 절름발이이며, 신작로의 애인 오미란은 다방 배달원으로 일한다. 그러나 이들의 직업 및 특징과 관련된 서사나 설명은 극에 드러나 있지 않고, 그들에게 부여된 설정이 극에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도 않는다. 신작로를 제외한 등장인물들의 삶이 극에 더 많이 녹아들었더라면, 등장인물들에게 더 많은 친밀함을 느끼고, 극의 비극적 결말이 더 안타깝게 느껴졌으리라 생각한다.

 

 

연극[짬뽕] 썸네일.jpg

 

 

연극 <짬뽕>은 2004년 초연 이후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연극은 그날의 광주에서 그저 묵묵히 자기 삶을 지켜내고자 했던 수많은 평범한 이들을 그린다. 우리 곁의 수많은 이웃들, 그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이 작품을 보며, 지금까지 <짬뽕>을 찾아주었던, 그리고 내가 극을 찾았던 그날에도 객석을 가득 채운 여러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평범하고도 소박했던 봄이 처참히 짓밟힌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한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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