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고전을 읽어내야만하는 이유는 - 이야기 미술관 [도서]

글 입력 2024.04.1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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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멋쟁이'의 이미지는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정장을 빼입고 컴퓨터를 두들기는 사람이 멋져 보일 것이고, 누군가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농구코트를 날아다니는 사람이 빛나 보일 테니 말이다. 수많은 멋쟁이들 중에서도 나는, 미술관에서 그림을 빤히 쳐다보고 나만의 해석을 갖는 사람이 멋져 보인다.

 

그림을 감상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는 움직이는 이미지이고, 책은 줄글로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그에 비해 회화나 조각품은 정적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 관객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특히나 고전주의 미술은 더욱더 그러하다. 모든 역사성과 서사성을 함축적으로 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그 호소하지 않는 예술성을 파고들고, 역사와 정치 그리고 종교를 가득 안은 채로 열심히 이해하고 끄덕이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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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저자의 신작 <이야기 미술관>은 내가 그러한 멋쟁이가 되어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총 19개의 작품을 4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자세하지만 친절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필요한 배경지식을 생소하지 않게 전달하고, 해석을 상상할 수 있는 열쇠를 쥐여준다.

 

생명력이 넘치는 색감을 담고 있는 영감의 방, 개인의 어두움과 외로움을 품고 있는 고독의 방, 애틋하고 간절한 감정을 표현한 사랑의 방, 시대를 뛰어넘는 메세지를 전달하는 영원의 방. 그중에서도 나는 클림트의 <키스>에서 사랑을, 뭉크의 <절규>에서 고통을, 피카소의 <게르니카>에서 평화를 포착하여 짧게나마 남겨본다.

 

 

 

아름답기만 하던 그들의 키스 너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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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7~1908

 

 

우리집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이 그림이 보인다. 언제부터 걸려있었는지 기억조차 안 날 정도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터라, 깊게 의미 부여해 본 적 또한 없다. 그저 화려하고 금빛 가득한 그림이다-라는 생각 뿐이었달까.

 

<이야기 미술관>은 클림트의 실제 여인들에 대해 소개하며 작품 <키스>에 대한 해석을 도와준다. 단순히 연인과의 행복하고 황홀한 키스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으로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책장을 넘길 수록 점점 바뀌어 간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과 <에밀리 블뢰게의 초상>을 비교하고, 에밀리가 클림트와 결혼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본다. 그들이 왜 절벽에서 키스를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내며 다시 그림을 바라본다. 클림트 자신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연인의 얼굴을 뚜렷하게 묘사한 것. 무채색의 직사각형으로 표현한 자신과 다양하고 화려한 색깔의 원으로 표현한 애인의 모습을 보며 그 둘의 관계성을 엿본다.

 

<키스>라는 작품의 제목이 후대에 부여된 것이며, 본래의 제목은 <연인>이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클림트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둘의 '사랑'보다는 그의 '연인'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가 황금비로 변신하여 다나에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처럼 그저 아름답고 행복해만 보이던 그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클림트의 씁쓸하고도 애절한 사랑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태양은 아름답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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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트 뭉크 <절규> 1893

 

 

우리집 현관에 클림트의 <키스>가 있었다면, 식탁 옆에는 뭉크의 <절규>가 걸려있었다. 아름답고 강렬하지만 혼란스러운 색감 때문일까, 식탁 근처에 걸어두었던 <절규>는 '다소 우울해진다'라는 엄마의 발언으로 인해 최근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로 대체되었다.

 

너무나 유명한 뭉크의 작품 <절규>. 충격적인 표정 묘사와 무너져 내리는 핏빛 색감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붓칠의 방식은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뭉크 자신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일 것이라 하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귀를 찢는 듯한 절규를 '듣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약간의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나는 불안으로 몸을 떨며 서 있었다. 그 순간 자연을 꿰뚫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뭉크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누이,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남은 형제마저 짧은 생을 보내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주변인의 죽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살아가며 수많은 병을 겪었고, 그를 보듬어주고 위로해 줄 수 있었던 애인들은 오히려 그의 친구와 양다리를 걸치고 광적으로 집착하는 등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우울과 비극 그 자체의 삶을 살아온 뭉크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그의 고통과 절규를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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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트 뭉크 <태양> 1916

 

 

그러나 이창용 작가는 뭉크의 또 다른 작품 <태양>을 보여주며 그가 우울하고 어두운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짚는다. 그토록 힘겨운 삶을 살아왔음에도, 밝고 아름다운 태양을 그려낸 것은 감동을 넘어서 경이로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뭉크가 당시 어떤 마음으로 이 <태양>을 완성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태양에서 나는 고통 속에서도 삶 그 자체를 긍정하고 예찬하는 자세를 느낄 수 있었다.

 

고통 그 자체의 삶일지여도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자 했던 뭉크. 조만간 <밤의 카페 테라스> 대신 뭉크의 <태양>이 우리 집 식탁 옆에 걸려있을 것 같다.

 

 

 

평화를 위하여 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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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미술로 세상과 맞서 싸운 수많은 작품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다. 미술 작품이 단순히 미적 아름다움이나 예술계 안에서의 혁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변화시키고, 잊어선 안 될 사건을 널리 알리는 정치적인 기능을 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이 진행되던 1937년, 스페인의 작은 시골 마을 게르니카에 폭격이 시작되었다. 프랑코 장군과 히틀러의 폭격은 마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현장에서 사망하게 만들고 수많은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심지어는 그 피해 규모를 감추기 위하여 시신을 모두 불태워 흔적을 없애버리는 잔인한 짓을 저지른다. 죄 없는 민간인의 희생과 그 잔혹한 학살에 분노한 피카소는 작품 <게르니카>를 그린다.

 

혼비백산 그 자체를 담아낸 작품 속에는 다양한 모습이 담겨있다. 불에 탄 집을 허망하게 쳐다보는 사람과, 영혼이 이미 빠져나온 사람. 창에 찔려 발버둥 치는 말, 바닥에 깔려 고통스러워하는 시신과 그를 밟고 지나가는 변질된 스페인의 조국을 나타내는 소.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아들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까지. 참혹한 현장 그 자체를 고발하고 있다.

 

피카소 특유의 불확실한 형체와 투박한 선, 그리고 작품 전체를 흑백으로 표현한 <게르니카>는 그 참담함을 더욱 극대화한다. 실제 높이가 3.5m, 길이가 7.8m인 거대한 작품을 불과 6 주안에 완성한 피카소의 분노는 감히 어림잡을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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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피카소는 이 외에도 다양한 작품을 통해 평화를 지지하고 전쟁의 잔혹함을 널리 알리는 데에 힘썼다. 특히 이창용 작가는 <한국에서의 학살>을 통해 우리와 가장 가까운 비극을 담아낸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를 연상케 하는 나체의 겁먹은 여성들과, 철과 갑옷으로 무장하여 그들을 겨냥하고 있는 군인들. 피카소는 6.25 전쟁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며 전쟁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나타냈다.

 

 
"그림은 아파트 거실이나 치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때론 우리가 전쟁과 유일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고전을 읽어내야만 하는 이유는


 

고전을 읽어내야만 하는 이유는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 또한 그러하다. 결국 삶은 돌고 도는 것이고, 인생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는 것이기에 고전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그 영감을 잘 포착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시대적 차이를 뛰어넘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그 사고의 시작은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결국 일상에서 가장 떨어져 있는 것만 같은 '고전'을 읽어낸 결과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발현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가장 친밀하고 세심한 자기표현의 이야기, 즉 예술은 타인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훈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각자만의 표현 방식과 감정의 모양을 다양하게 접하다 보면, 나 자신에 대한 탐구로까지 이어지며 제대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이창용 작가의 <이야기 미술관>은 그러한 고전 미술 작품을 읽어내는 첫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나는 이 책을 시작으로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다양하게 읽어내고 싶다. 사랑과 고통 그리고 평화에 관련하여 짧게나마 남겨본 이 글 너머에 존재할 무한한 가치를 포착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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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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