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든 것들의 영원한 시간은 언제, 어디까지고 [도서/문학]

단편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2022)
글 입력 2024.05.1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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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 「이토록 평범한 미래」 中

 

 

이렇게 단호하고 직설적인 낙관이라니. 요즘 내게 이런 희망적인 문장은 잘 뽑은 포춘쿠키의 쪽지를 펼쳐봤을 때, 혹은 재미로 본 오늘의 운세에서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 될 거라는 말이 나왔을 때처럼, 공허한 말장난쯤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지 오래였는데 말이다.

 

단순히 주관적인 느낌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에게 낙관은 많은 경우 부덕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낙관하고 앉아 있어선 안 될 이유를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절망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렇다. ‘머릿속이 꽃밭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효과적인 모멸의 표현으로 자리 잡았는지 떠올려 보라. 그 이면에 다음과 같은 중론이 있다고 짐작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현실을 살아가는 감각이 꽃밭을 노니는 일보다는 도처의 불행, 비운, 실패 가운데서의 줄타기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에 대응하는 합리적인 사고와 행동 양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실패하는 자유민주주의 기획과 극우 포퓰리즘의 득세, 무력한 ‘국제 질서’, 저성장과 침체, 사상을 초래하는 기후 위기를 직간접적으로 체감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더 국지적으로는 소통 불능과 출산율 ‘0.6명대’의 시대가 개막된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대뜸 장밋빛 미래를 그려보라니. 낙관은 차라리 모욕에 가깝다. 개발, 발전, 진보의 시대를 지나 지금에 이른 역사의 경로에 의해 희망은 오명을 잔뜩 뒤집어썼다. 비관과 냉소가 현대인의 미덕이다.

 

다만, 그 뒤에 무엇이 남는가? 미덕을 성실하게 함양해 온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종종 멈춰 섰다. 세상이 이대로는 글러 먹었다는 직감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한다고 해도, 제동을 걸고 항로를 변경할 동력조차 다 소진돼 버린 것만 같다면. 그러면 미덕의 실천이, ‘꽃밭에서 좀 나오세요’라는 정중한 욕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 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

 

-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中

 

 

낙관을 아는 비관주의자, 혹은 비관을 아는 낙관주의자는 답한다. 그럴 때면 별수 없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식의, 뻔하고 순진하며 무책임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고. 마법처럼 모든 갈등은 해소되고 평화가 회복되는 이야기들이 수없이 되풀이돼 온 이유는 이야기를 놓지 않을 때 그 이야기가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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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8편의 단편 소설은 모두 같은 이야기로 귀결된다. 결국엔 이야기가 삶이 될 거라고 믿을 수 있어서,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절망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믿음은 미래에 뿌리를 내린다. 누구나 과거를 돌아보듯, 그렇게 하고자 마음먹는다면 미래 또한 적극적으로 상상할 수 있고,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변인이 될 수 있다. 당연히 의문이 들 것이다. 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따를 이유가 뭐가 있을까? 사실 그럴듯한 이유는 없다. 여기서 필요한 믿음은 근거 없는 믿음, 일종의 신념에 가깝다.

 

나는 신실하게 믿음을 실천하는 종교인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다. 신이 죽은 이후에 인간은 무엇이든 이룩해내고 말 이성의 주체인 것처럼 호명되었지만, 지금은 어디로 추락해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신세다. 혼란 속에서 각자의 지도를 더듬어 길을 찾는데, 나는 하필이면 지독한 길치여서, 같은 지도를 맞들고 함께 길을 헤매는 신자들을 감히 부러워한다. 결국엔 모든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건, 그건 도대체 어떤 감각일까?

 

이 이야기들은 늘 궁금했던 바로 그 감각을 추체험하게 한다. 부질없어 보이는 이 모든 순간이 결국엔 명료한 의미를 부여받는 미래에 도착하는, 그럴듯하게 아름다운 이야기들에 푹 빠져들게 해서, 당신도 믿음에 뛰어들라고, 도약할 수 있다고, 그래서 이야기를 살아낼 수 있다고 어깨를 두드린다. 믿음의 도약을 받치고 있는 기초는 소설 속에서만 가능할 특별한 허구의 장치가 아니다. 그저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한 회고가 있으며, 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화자와 청자 사이에서 어떤 언어를 통해 발화되고 이어지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기억과 삶이 이야기로 화하는 과정을 돌아보는 눈이 이 세계 속에선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그러고자 마음만 먹을 수 있다면 당신 또한 얼마든지 그 눈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도달한 자들은 증언한다.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진주의 결말」 中)을 인간의 마음으론 짐작할 수 없으니, 상실엔 어떠한 본래의 의미도 없어 그 자체론 허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기억한다. 해가 저물어갈 때 점점 더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처럼, 상실을 직면할 때 분명히 그곳에 사랑이 있었음이 선명해진다. 기억하기를 멈추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선택한다면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사랑의 단상 2014」 中).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 된다. 그렇게 “아이러니의 울음”을 울고 나면, “우리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거기 희망이 생겨”난다. (「엄마 없는 아이들」 中) 상실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기억하는 우리에게 “하루하루는 늘 새 바람이” 우리 “쪽으로 불어오는 나날”이 될 수 있다. 바람은 다정하지 않다. “골짜기의 어두운 밀림과 강이 계속 흘러 범람하는 곳의 혁명이나 기근, 역병도 모두 부처의 선”이다. 하지만 또한 어느 곳에서는 “목련나무가 부처의 선”이라는 걸 우리는 얼마든지 기억할 수 있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中) 비록 바람이 불어 우리를 어느 먼 곳으로 데려다 놓을지 알 수 없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새로움을 발생시키는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매일이 이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 희망의 실체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中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바람은 더 오래, 더 멀리까지 불 수 있다. 2004년경 종말을 맞은 사랑에서 길어 온 기억으로 2014년 4월 16일의 견딜 수 없는 비극을 이국의 무대에서 애도할 수 있었던 어떤 가수는, 위 문장들로 이어지는 기억의 효용을 물었다. 1949년 사랑하는 동생이 이념의 전쟁통에서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맞았던 기억으로 언제고 되돌아가는 삶을 살다가, 2020년 팬데믹의 웃음과 기쁨이 귀해진 병실에서 죽음을 맞은 노인은 답을 가지고 있었다. “개별성에서 멀어진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은 얼마간 서로 겹쳐져 있다는” 것이다. 같은 순간, 같은 공간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수” 있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中) 타자와 연결되기를 선택함으로써 희망이 발견될 수 있는 시공간은 내가 살아낼 수 있는 평생의 시간 이상, 발걸음이 닿는 시야 너머까지로 끝없이 확장된다.

 

그러니 “시간의 폭풍이” 시시각각 불어닥치고, 결국엔 그렇게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히”는 것은 허무한 상실이 아니라 영원한 희망에 몸을 누이는 일이 될 수 있다. 바얀자그에서 우리는 모든 것들의 영원한 시간이 언제, 어디까지고 겹친 것을 본다. 그것이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가 삶이 되는 시점의 도래를 대책 없이 믿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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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자 어둠 속에서 고대의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사시대, 혹은 아직 인간이 지구에 나타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하늘. 별들만이 가득한 하늘. 광활하게 펼쳐진 공간처럼 시간 역시 계속 뻗어나갔다. 과거로, 더 먼 과거로, 시간이 시작되던 그 순간까지. 그렇게 시간은 쌓이고 또 쌓여 한없이 깊어졌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사막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에서 본 ‘깊은 시간 deep time’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깊은 시간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미래의 바람은 우리를 오싹하면서도 시원하게 만든다. 붉은 천이 나부끼듯 노을빛이 넘실거리던 바얀자그의 일몰 속에서 그는 그런 바람을 맞고 있었다. 지평선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태양은 더이상 붉어질 수 없을 때까지 붉어졌고, 그 빛을 받은 바얀자그의 모든 것들, 바위와 모래와 절벽과 관목 들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어딘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中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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