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난민을 어떻게 이해할것인가 -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 [공연]

글 입력 2024.04.2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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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도 난민화될 가능성을 가진 채 살고 있다.”


여러 이유로 자기 나라의 보호를 받을 수 없어진 자들. 나를 지킬 국가를 자의든 타의로든 잃는다는 것. 우리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현대 시대에 있어 국가란 나를 지킬 무기이자 방패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국가를 지켜내고 국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런 국가가 나를 내친다면. 그런 현실이 내게 온다면. 나는 무법지대에 버려지는 것과도 같다.


국가가 생기기 전의 시대. 진짜 무력이 힘을 쓰던 시대. 법과 규율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로의 회귀. 끊임없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난민의 삶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그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신들의 땅 콜로노스로 향한다. 콜로노스의 시민들은 큰 죄를 저지른 오이디푸스를 거부하지만 아테네 왕 테세우스는 그를 받아들인다.


작품에서 오이디푸스는 현시대의 난민이다. 더 이상 자기 나라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며 기존의 시민들에게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라는 공통점. 극은 오이디푸스와 현시대의 출입국 사무소를 오간다. 여섯명의 배우가 현시대에서 각자가 처한 난민의 삶을 보여주고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이야기가 내포한 의미를 되새긴다.

 

삼면이 철창으로 이루어져 있는 무대는 마치 감옥과 같이 느껴진다. 그들은 종종 크고 강력한 몸짓으로 분노를 터트리고 그에 맞춘 강한 악센트의 리듬이 심장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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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문제를 신화에 비유하는 것의 장점은 이입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는 난민의 비극은 잘 모르지만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안다.  그가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 운명. 자의가 아니었기에 더 슬픈 그의 이야기. “콜로노스는 어찌하여 그를 받아주지 않는가! 그의 비극을 어째서 그의 탓으로 보는가.”


그러나 극은 우리를 오이디푸스에게 온전히 이입하지 못하게 한다. 거리 두기 기법을 통해 극의 이야기와 진짜 우리의 현실과 난민에 대한 나의 생각을 자꾸 떠오르게 한다. 이 극은 현실의 이야기임을 알리려고 하는 듯했다.


덕분에 진짜 현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건 바로 콜로노스의 사람들이다. 자신의 것을 지키고 싶은 성 안의 사람들. 앞서 말했듯 국가는 시민의 무기이자 방패다. 시민은 국가를 지키려 똘똘 뭉치게 되어 있다. 그것이 곧 자신을 지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특정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특권. 그 특별한 권리를 쉽게 내어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특권을 잃을 일이 일상에서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과연 특권을 잃은 자들, 난민에 대한 이해가 쉽사리 이뤄질 수 있을까?


특정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타의가 부여한 운명이다. 그렇다면 난민이 될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도 마찬가지로 타의가 부여한 운명이다. 우리는 운명을 특권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오이디푸스는 어떻게든 신탁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그것은 이루어지고 말았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에게 ‘당했다’. (연극의 표현을 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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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오이디푸스를 콕 집어 재앙을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면 되는 걸까? 과연 운명의 화살이 우리에게 올 일은 없을까? 훗날 운명이 우리를 선택했을 때 그저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것이 운명이니까?


운명을 이야기한다는 건 자칫 감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요소는 될 수 있었다.


즉, ‘우리는 누구도 난민화될 가능성을 가진 채 살고 있다’는 것.


국가를 잃은 자들이 다른 국가로 수용되길 바라는 것은 결국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무리를 이루고 그 사회 속에서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


다만, 특권을 쉽게 내어주지 않으려는 마음도 이해해야 한다. 자신의 것을 빼앗긴다는 두려움. 우리는 그 두려움을 어떤 방식으로 없앨 수 있을까?

 

두려움이란 안개다. 안개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두려움을 없애고 존재를 직시해야만 이 문제를 실질적이고 합리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난민은 결국 소수다. 경계 밖으로 내몰린 소외된 자들. 분명히 있으되 ‘없는’존재가 되어 버린 사람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와 역동적인 춤과 노래는 그들의 울분을 너무도 잘 표현해 주고 있었다.

 

흥미로운 신화와 현대의 문제를 잘 엮어낸 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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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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