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진정한 죽음은 소통의 단절 [공연]

뮤지컬 '비틀쥬스'를 보고
글 입력 2024.01.27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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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급 감성의 뮤지컬을 좋아한다. 웅장하고 세련된 감성의 뮤지컬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엉망진창, 정신없는 전개로 관객을 훅 끌고 가는 전개에 더 몰입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 뮤지컬 속 인물들을 만나고 나면 주로 개운하게, 가끔은 씁쓸한 마음으로 웃고 나올 수 있었다. 또 재미도 중요하지만, 그 중 분명한 메시지가 존재하는 극을 만날 때 가장 반가움을 느낀다. 그간 어떤 뮤지컬을 가장 인상 깊게 보았냐는 질문이 들어온다면, 단연 '비틀쥬스'였다고 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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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ole Being Dead Thing


 

그래서 '비틀쥬스'의 주인공이 누군가 하면, 제목 그대로 수백 년 이상의 세월 동안 지박령으로 살아온 비틀쥬스다. 정의로운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그는 블랙 코미디에 걸맞은 행보를 보여준다. 자신을 퇴치하러 온 신부를 되려 매달아 놓고 농락하질 않나, 그간 너무 외로웠다는 핑계를 들며 십 대 소녀와 결혼하려 들기까지 한다. 이렇게 악랄한 짓을 일삼는 와중, 비틀쥬스는 나름대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것이다.


매체에서 그려내는 죽음의 이미지는 의외로 친숙하다. 애니메이션 '코코'에서는 죽은 이들의 모습을 그저 더는 이 세상에 없을 뿐이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가족, 친구와 같이 유쾌하게 묘사하며, 애니메이션 '유령신부'의 대표곡 Remains of the Day에서 볼 수 있는 지하세계의 알록달록한 모습 역시 지상의 칙칙한 세계와 대비된다. 이런 연출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 모두가 은연 중에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보듬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비틀쥬스'에서도 약간의 '매운맛'이 첨가된 것만 빼면 비슷한 메시지가 등장한다.  비틀쥬스는 운동해도 죽고, 건강식만 먹고 살아도 죽고, 아등바등 살아봤자 어차피 다 죽게 되어 있다 주장하며 위로인지 농락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말을 통해 웃음을 준다.

 

 

 

Dead Mom


 

그리고 비틀쥬스에는 또 다른 주인공이 존재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차려입은 십 대 소녀 리디아가 그 인물이다. 리디아는 옷차림만큼이나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다. 아빠에게 비딱한 태도를 보이고, 유령이며 사후세계에 푹 빠져 있다. 이 꼬일 대로 꼬인 사춘기 소녀의 소원은 의외로 단순하다. 바로 죽은 엄마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것.


못 말리는 악령 비틀쥬스만큼이나 리디아 역시 만만하지 않다.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말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며 접근해 오는 비틀쥬스를 역으로 골려주며 나름의 강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신을 자꾸만 무시하는 아빠의 모습에 리디아는 결국 폭발하고, 기어이 비틀쥬스와 계약하게 된다.


비틀쥬스는 외로운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리디아를 이용하고, 리디아 역시 죽은 엄마를 사후세계에서 다시 만나기 위해 비틀쥬스를 이용하려 한다. 표면적으로 다뤄지는 것은 리디아와 비틀쥬스 간의 싸움이지만, 사실 리디아와 가장 갈등을 빚고 있는 상대는 리디아의 아빠, 찰스였다. 리디아의 반항은 이유 있는 반항이었다.


찰스와 리디아는 아내이자 엄마를 잃는 동일한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찰스는 그 이후로 리디아와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으며, 리디아가 엄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막았다. 아내의 이름을 부르지도, 추억을 되새기지도 못하게 했다. 그렇기에 리디아는 엄마가 영영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품게 된 것이었다.


리디아에게 엄마가 없고, 아빠는 침묵하는 곳은 집이 아니었다. 비틀쥬스를 속여가며 기어이 사후세계까지 발을 들인 리디아였지만, 역시 그곳에도 엄마는 없었다. 이때 리디아를 일으켜 준 것은 찰스와의 진정한 대화였다. 엄격하고 강인한 아버지의 역할을 고집했던 찰스는 왜 엄마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냐는 리디아의 물음에 결국 그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이에 리디아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사후세계에서 엄마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찰스와 상실의 아름을 나누는 것이 아니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점에서 비틀쥬스는 현실과 닿아 있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등의 기적을 기대할 수는 없어도, 아픔을 딛고 회복하는 것은 가능했으니까.

 

 

 

역시 소통은 중요하다 


 

'비틀쥬스'에서 진정한 죽음은 물질적인 죽음이 아닌, 소통의 단절을 의미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에게도 모습을 드러낼 수 없어 무지막지하게 외로워했던 비틀쥬스를 시작으로, 우연한 사고로 죽은 이후 내내 비틀쥬스에게 휘둘렸던 신혼부부 아담과 바바라 역시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진정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한 채 살다 죽은 것을 후회한다. 남에게 보이는 모습만을 신경 쓰며, 남은 물론 자신에게도 진솔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틀쥬스'를 관람할 때 느꼈던 기분을 되새기며, '문화는 소통이다'라는 아트인사이트의 캐치프레이즈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스스로 글을 쓰면서도 그렇지만, 요즘은 특히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 뭔가 더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어디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몰라 방황하다, 비로소 내 길을 찾아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만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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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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