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인종과 종교를 지우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시 쓰다,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 [공연]

글 입력 2023.12.3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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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은 2012년 국립극장 레퍼토리 시즌 도입 이후부터 전통의 틀을 깨고, 창극 <메디아>, <트로이의 여인들>, <리어> 등과 같이 서양의 작품과 창극을 결합하며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왔다. 국립창극단은 전통(판소리)을 유지하면서도,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며 시대의 흐름에 맞게 유연하게 변화하고, 도전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와 더불어 젊은 스타 소리꾼 김준수, 유태평양 등을 필두로 하여 이전과 비교했을 때, 창극의 대중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최근 국립창극단에서 공연한 작품들은 모두 전석 매진을 기록했을 만큼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보이고 있다.

 

2023년 초연한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은 이런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국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원작으로 했으며, 기존 등장인물의 연령대를 낮추어 안토니오 役에 유태평양, 샤일록 役에 김준수, 바사니오 役에 김수인, 포샤 役에 민은경을 캐스팅했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리어』를 각색한 창극 <리어>가 도교사상과의 결합을 시도했다면,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은 종교의 시대에서 자본주의 시대로의 전환을 꾀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동안 연극,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각색되었다. 그러나 『베니스의 상인들』은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만큼 한국 공연계에서는 이를 원작으로 한 공연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열(연출), 김은성(극본), 한승석(작창), 원일(작곡)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어 낸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은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으며, 본 작품에서 ‘창극’이라는 장르가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종과 종교가 지워지고,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다시 쓰이다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과 원작 『베니스의 상인』에서 표면적으로 가장 먼저 들어오는 차이는 바로 ‘상인’에서 ‘상인들’로 변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베니스의 최고 자본가로, 신실한 기독교인이자 베니스의 거상인 안토니오는 신념 있는 젊은 사업가로 변화한다. 즉, 인종─유대인에 대한 혐오─과 종교─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의 색채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자본주의가 메운다. 더불어 안토니오의 친구인 바사니오는 사치스러운 삶을 영위하다 빚쟁이가 되어, 이 빚을 해결하기 위해 포샤에게 청혼하게 되는 인물이 아닌, 한눈에 사랑에 빠진 철부지이자 순수한 남자가 된다. 이와 더불어 샤일록의 딸 제시카, 론슬롯 등의 캐릭터가 빠지고, 마르코, 샤일록 회사의 직원들과 안토니오가 이끄는 상인조합의 소상인들과 같은 새로운 인물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이때, 제시카와 로렌즈의 사랑 이야기가 빠지면서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은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대립, 그리고 포샤와 바사니오의 플롯을 통해 연민과 같은 감정은 무시된 채 이득만 중시되며, 내면보다 외면만 중시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비판한다.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대립은 곧 재벌과 소상공인들의 상인 조합의 대립으로 나아간다. 대규모 무역상사의 회장인 샤일록은 자신의 무역업을 위협하는 상인 조합 대표 안토니오에게 합작 사업을 제안하지만, 상인 조합을 흡수하려는 샤일록의 의도를 간파한 안토니오는 이를 거절하고 샤일록은 이에 모욕감을 느끼며 상인 조합을 해체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에 샤일록은 상인 조합을 무너뜨리고 안토니오에게 복수하기 위해 안토니오에게 삼천 더컷(현재 통화가치 약 30억 원)을 빌려주고, 의도적으로 안토니오의 배를 침몰시킨다. 이에 샤일록은 황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악인, 안토니오는 자신의 친구인 바사니오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줄 수 있으며, 그가 이끄는 상인 조합의 소상공인들을 위해서는 헌신하며 연대를 중시하는 선인으로 그려진다. 원작에서는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은 인종과 종교 때문이다. 안토니오는 유대인인 샤일록을 비난하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샤일록에게 엄청난 인신공격을 퍼붓는 인물이다. 이에 샤일록은 안토니오에 대한 적개심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그에게 지금까지 당한 모욕감을 갚아줄 수단으로써 그가 돈을 기한 내 갚지 못했을 때 가슴살 1파운드를 요구했을 뿐, 일부러 안토니오의 배를 난파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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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일록의 모습 (출처 : 국립극장 인스타그램)

 

 

이처럼 원작에서 안토니오와 샤일록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은 기독교적 관점에 의한 것이며, 샤일록이 왜 그토록 안토니오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자세하게 보여주며 안토니오와 샤일록의 개인 서사를 견고히 한다. 그러나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에서는 안토니오와 샤일록의 개인 서사가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샤일록이 안토니오에게 적개심을 가지는 이유가 극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안토니오와 샤일록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기준은 종교에서 ‘돈’으로 바뀌며, 샤일록은 원작에 비해 평면적으로 전락한다. 더불어 샤일록이 어떻게 베니스에서 대규모 회사의 회장이 될 수 있었는지, 안토니오는 젊은 나이에 어떻게 성공한 사업가가 될 수 있었는지, 그가 소상공인들과 상인 조합을 어떻게 만들었으며, 왜 그가 상인조합의 소상공인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이에 각 인물이 표출하는 감정에 ‘왜’가 빠지게 되면서 관객은 의문을 가진 채 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게 된다. 

 

즉, 본 작품은 선인 안토니오가 승리하고, 악인 샤일록이 파멸하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결말을 보여주기 위해 달려가는 플롯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곧 개별 인물의 서사는 사라지고, 각 장(chapter)들이 쌓여가며 결론을 향해가는 방식인데, 최근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창극 <정년이> 또한 이와 같은 방식을 채택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한편으로는, 개별 서사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고, 장면만이 구축되어 가는 형식은 주인공보다 앙상블을 더 내세우는 창극의 미학으로 보인다. 창극에서는 주인공보다 앙상블이 더 많은 노래를, 그리고 장면을 채워나가며 그들에게 초점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은 오페라나 뮤지컬과 같은 극 장르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다가온다. 창극의 대중화를 논하는 지금, 이 시점에 창극의 이러한 극 구성의 측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창극에서는 서사를 어떻게 구축해 나갈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창극과 뮤지컬 그 경계에서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의 무대는 여백의 미를 강조하는 다른 창극 작품들과 달리 샤일록의 집무실 배경은 원색적이고, 벨몬트 섬은 동화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안토니오와 샤일록이 무역업에 종사하는 만큼, 무대 바닥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는 배 갑판을 연상시키고 최대한 화려하면서도 창극 무대 고유의 여백의 미를 잃지 않도록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와 더불어 등장인물의 의상은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적인 미가 적절하게 어우러져 ‘창극으로 풀어낸 셰익스피어 작품’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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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몬트 섬 (출처 : 국립극장 인스타그램)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국립창극단 역대 작품 중 최다 곡 수인 62개의 곡이 편성되었으며, 국악기와 아이리쉬 휘슬, 마림바 등 이국적인 악기가 어우러진 16인조의 음악과 전자음악 ─ 록, 팝, 헤비메탈 등 ─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전자음악이 비중 있게 사용되다 보니, 기존의 창극보다 노래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긴박한 분위기가 효과적으로 형성되는 등 기존의 국악기로는 표현하기 힘든 음과 선율들이 더해져 극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작창은 원작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지되, 각색된 부분에 있어서는 완전히 새롭게 가사를 썼다. 이때 판소리의 해학이라 일컬어지는 의성어, 의태어는 고스란히 유지되었으며 중간중간 현대 유행어를 삽입시켜 웃음을 유발하고, 관객과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혔다. 그러나, ‘에누리’, ‘영끌’ 등과 같이 다소 세련되지 못한 언어들의 삽입에는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자면, 음악의 강조점이 안토니오가 아닌 샤일록에게 찍혀있다는 것이다. 작품은 안토니오를 통해 연대와 정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토니오에게 힘을 실어주는, 그를 부각해 주는 넘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음악은 샤일록을 부각한다. 특히, 샤일록이 법정에서 파멸하는 순간 부르는 넘버 “돈 돈 돈”은 극 전반을 압도하며 샤일록에게 모든 힘을 주어 작품이 가진 의도에 의문을 품게 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서사마저 희미하게 만든다. 물론, 전반적으로 안토니오의 유태평양이 음악적으로 기틀을 잡아주고, 여기에 샤일록의 김준수가 날카롭게 찌르듯이 들어오며, 바사니오의 김수인이 통통 튀는 발라드풍으로 부드러움을 더하며 음악의 분위기는 조화롭게 진행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덧붙여 전자음악의 개입은 창극과 뮤지컬의 경계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내면과 욕망을 노래로 이야기하는 샤일록, 안토니오, 바사니오, 포샤의 모습은 창법과 무대 미학을 제외한다면 뮤지컬과 무척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듯, 최근 언론에서 창극을 ‘조선판 뮤지컬’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쉽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창극을 ‘조선판 뮤지컬’로 쉽게 치환하여 부르는 것은 경계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이는 창극이 낯선 대중들에게 창극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자칫 창극이 가진 고유성과 미학을 실추시키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표현은 창극이 고유의 미감과 형식을 정립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재 국립창극단이 보여주는 창극은 <심청가>, <패왕별희>, <트로이의 여인들>만을 살펴보아도 각양각색의 형식과 미감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작품 간의 통일적인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럼에도... 사라진 연대와 정의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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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바사니오와 상인들의 모습 (출처 : 국립극장 인스타그램)

 

 

한국 사회는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하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무한경쟁의 굴레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공동체 의식은 약화되었으며 개인주의가 강해졌고, 사회 구성원 간의 연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었다. 각자가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 힘들게 되었으며, 누군가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또한, 약육강식의 구조 속에서 흔히 말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하나의 법칙처럼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선함이 악함을 이기는 것은 드문 일이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은 사라져 버린 연대의 아름다움과 공정함으로서의 정의를 환기시킨다. 창극은 소수의 비범한 주인공만 강조하지 않는다. 평범한 다수의 주인공 또한 중요한 존재이며, 이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한 아쉬움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창극만이 할 수 있었던 시도이자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록 샤일록이 두드러지기는 했지만, 소상공인들 간의 연대, 그리고 그 연대가 이루어 낸 선함이 악함을 이긴다는 메시지는 관객에게 전달되었다. 특히, 최근 공연계에서 “여성 연대”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젠더와 연대가 결부되는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 데 반해, 본 작품에서는 젠더와 결부시키지 않고 이 시대에 사라지고 있는 공동체 연대의 힘을 다시금 부각했다는 점은 분명 의미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소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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