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오랜만에 그 책을 다시 꺼내 보았다

글 입력 2024.01.27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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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모으는 습관이 있다. 집이 좁아 참고 있지만, 언젠가 책장 여러 개를 충분히 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면 그곳을 내가 사모은 책들로 빼곡히 채우고 싶다. 물론 그때까진 시간이 좀 더 필요하기에 지금까지 모은 책들의 대부분은 본가에서 나 대신 임대살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그 책들 거의 다 한 번 밖에 읽지 않았다. 끝까지 못 읽은 책들도 부지기수다. 좋아서 모으긴 했지만 세상엔 더 좋은 책들이 많고, 그보다 더 즐거운 것들이 넘쳐났다. 덕분에 욕심 많은 내게 시간은 늘 모자랐다. 이미 한 번 보았던 것들에 다시 눈길을 줄 만큼 나의 일상은 여유롭지가 않았다.


허나 그중에는 시간이 흘러서도 몇 번씩 찾게 되는 책들도 있다. 마냥 좋아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기대고 싶어서 찾는 이야기들이 있다. 마치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 ‘나’에게 <위대한 개츠비>가 그랬듯이. 공지영 작가가 쓴 <높고 푸른 사다리>는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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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만난 건 내가 19살이었을 때였다. 소설은 수도자인 요한이 소희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다. 그런데 그 흔한 사랑 이야기가 어린 나를 많이 울렸다. 


소설 속의 표현을 빌려 말해볼까. 살면서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제 몸속에 불타는 열기를 너무 많이 가진 탓에 괴로워하던 때가 있었다. 온몸의 뼈가 부러진 사자처럼 매 순간순간이 고통스러워하던 적이 있었다. 도저히 스스로의 미래를 그리지 못하는 암울한 나날들이 계속되던 때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소설 속의 ‘요한’은 나와 무척 닮은 사람이었다. 그는 생애 29번째 해에 가족과도 같은 안젤로와 미카엘을 잃었다. 사랑했던 소희와 이별했다. 나도 그랬다. 이제 막 19살이 되었을 때, 친구 하나가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가 많이 아프셨다. 가장 힘들었던 건 음악을 하고 싶었던 꿈을 포기한 것이었다.


물론 돌이켜 보면 그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의 재능은 애매했고, 이제 와서 그 순간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때는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하기가 참 힘들었다. 거기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닥친 일들은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을 읽었다. 그중 한 문장이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박힌 조각은 이후로도 마음속에서 여진을 만들었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사랑하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문장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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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픽사베이

 

 

소설 속에서 요한은 소희를 사랑했다. 수도자라는 신분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도자의 사랑이 그렇듯 두 사람의 이야기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창 이별에 괴로워하던 요한에게 그의 할머니는 짧은 여행을 제안했다. 그 여행길에서 할머니는 요한에게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50년의 세월을 견디게 해준 1년 6개월간의 사랑 이야기를 말이다.


이야기의 끝에서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히려 내 나이에 나처럼 행복한 여자가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나는 그 문장에서 잠시 책 읽기를 멈추었다. 이야기를 듣는 요한도 아마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못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에 그녀는 이후에 그 어떤 사랑의 열락도 누리지 못했다. 그토록 열망하던 것을 영영 잃어버린 고통 속에서 50년을 살아왔을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행복한 여자라고 말했다. 모순투성이의 말이었다. 하지만 눈치 빠르고 영리한 요한은 곧바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모양이었다. 바로 다음 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시간이 마모 시키는 것은 비본질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진정한 사랑은 마모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한 고통도 진정한 슬픔도 진정한 기쁨도. 시간은 모든 거짓된 것들을 사라지게 하고 빛바래게 하고 그중 진정한 것만을 남게 한다는 것을. 거꾸로 시간이 지나 잊힌다면 그것은 진정에 가닿지 못한 모든 것이라는 것을.’

 


그가 말한 건 ‘진정으로 가닿은 것들’에 대한 대한 정의였다. 그랬다. 왜 거꾸로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요한의 할머니가 행복할 수 있었던 건 사랑의 달콤한 열락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후에 찾아왔던 다른 사랑들은 그때 그 1년 6개월만큼의 기쁨을 주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요한의 할머니는 그 나이에도 행복한 여자가 될 수 있었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군가에게 그토록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 혹은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최고의 행운이자 행복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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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픽사베이

 

 

책을 덮은 후 어렸던 나는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쉽게 그려지지 않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던 건 다른 사람들만큼 나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에 가끔씩은 우울했던 19살의 나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 만약 그렇다면 미래의 나는 19살 시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리워할까. 여전히 아쉬워할까. 어쩌면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만약 여전히 아쉬워하고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품었던 꿈은 요한의 할머니가 가졌던 1년 6개월과 같은 의미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언젠가 닳아버릴 수밖에 없는 유한한 삶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끝끝내 남아 있을 무언가를 가져봤다는 사실만으로 그 인생은 충분히 가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라는 책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왔다. ‘사랑이란 도착 지점이 아니라 여정 그 자체를 일컫는 말이다.’ 중요한 건 꿈의 성패가 아니었다. 내가 그 꿈을 얼마나 진심으로 열망했는지다. 만약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아쉬워하고 있다면 내 진심의 무게는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무거울 것이다.


그럼 아무런 감정도 느끼고 있지 않다면 어떨까?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다. 소설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바다에 놀러 갔던 날, 집에 가져갈 조개껍질을 고르던 어린 요한은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딱 하나만 간직하려구요. 미워서 버리는 게 아니에요.’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단 하나의 조개껍질만 목에 걸 수 있다. 그래서 수많은 조개껍질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고르기 위해 애쓴다. 그렇다고 버려진 조개껍질들을 미워하는 건 아니다. 만약 음악이 내게 진정으로 가닿지 못한 것이라면,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거라면 내게 가장 아름다운 조개껍질을 목에 걸 기회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 사실에 나는 다시금 미래를 그릴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앞서 말했던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라는 책을 다시 펼쳐보면. ‘꿈을 꾼다는 것은 기억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이고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의미’라는 문장이 있다. 이제 나는 음악보다 나를 더욱 열렬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다시 나아가기 위해 새로운 꿈을 꾸고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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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픽사베이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오랜만에 <높고 푸른 사다리> 책장에서 꺼내보았다. 얇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19살에 남긴 흔적들을 더듬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우울했던 남학생은 서른을 목전에 둔 직장인이 되었다. 지금의 난 과거의 꿈을 향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까. 그리워할까. 아쉬워할까. 아무렇지도 않을까. 마음이 복잡하게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알겠다. 그 시기를 내가 무사히 지나왔다는 것. 앞으로도 몇 번이나 비슷한 시련을 마주할진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꾸역꾸역 나아갈 수 있겠다는 것.


카프카는 말했다. ‘책은 우리의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고. 만약 좋은 책의 기준을 카프카의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내겐 이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문장으로 절망하던 소년을 낙관적인 성인으로 바꿔 놓았으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이 책을 오랜만에 정독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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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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