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모든 희생은 비극적이다 - 뮤지컬 피에타

글 입력 2024.03.1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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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표정의 여인이 자신의 아이가 주는 행복을 노래한다. 단둘이 손을 잡고 다정하게 산책을 나서기도 한다. 자신의 아이에게 한없이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앞으로 펼쳐질 아들의 삶을 고민한다. 사회 부조리와 불의에 맞서 싸우는 삶을 살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는 상황이 좋아지길 바라며 그저 순응하는 삶을 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다.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시체를 무릎 위에 놓고 애도하는 마리아를 표현한 것으로, 기독교 미술의 주요 주제다. 그러나 예수의 비참한 죽음과 마리아의 절규가 사회 부조리에 저항하는 개인을 억압하고 단죄하던 불행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임을 생각하면, 피에타를 종교적인 주제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뮤지컬 피에타_포스터.jpg

 

 

뮤지컬 <피에타>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끊이지 않았던 ‘사회구조의 악’에 대한 고찰이다. 그래서일까, 뮤지컬 <피에타> 속 올바른 세상을 외쳤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예수와 그 모습에 절규하던 마리아를 보면 불행한 시대와 세상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희생됐던 수많은 이들, 그리고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가족이 떠오른다.


극 중 마리아는 그녀가 살아가는 부조리한 세상을 자주 이야기한다. 세상이 변하지 않길 바라는 부자들과 더 불행해지는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민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힘 있는 민족. 시대에 대한 푸념 속에서도 마리아는 어머니로서 아들이 안온한 삶을 살길 바란다. 그것은 절대자에 의해 언젠가는 구원받으리라는 희망을 품으며 지금 당장의 부조리를 묵인하는 삶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아들은 그러한 삶을 택하지 않는다.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구원이 되고자 한다. 그는 입바른 소리를 하고,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설파하며 수많은 이들의 지도자가 된다. 그렇게 아들은 어머니의 안락한 품을 떠났고, 아들의 삶은 마리아의 바람과 멀어져갔다. 그녀는 위험한 길을 택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초조해하지만,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아들을 먼발치서 바라보며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마리아는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을 잃어야 했다. 아들의 팔, 다리에 못을 박는 크고 단단한 쇳소리가 세 번 울려 퍼진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그저 더 사랑했을 뿐인 아들에게 이렇게나 잔인한 형벌이 내려지는 세상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마리아는 아들을 살해한 이들과, 아들과 함께했지만 그런 아들을 지켜주지 못했던 힘없는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저 지켜봤을 절대자 ‘그분’께 처절히 분노한다.


“자식의 팔에 못이 박히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으신가요.”


이것이, 관객에게 전하는 마리아의 마지막 외침이다.


뮤지컬 <피에타>는 일인극으로, 어떤 무대장치나 소품 없이 마리아 한 사람이 온전히 극을 끌어나간다. 그녀는 아들에 대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보고 들은 바를 관객과 대화를 나누듯 이야기한다. 자신의 어린 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세상이 얼마나 불행해져 가는지, 아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얼마나 기쁜지, 진실을 전했던 아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수모를 당하는지, 수많은 이들의 지도자가 된 아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그렇게 관객은 극이 전개되는 70분 동안 마리아와 대화하며 그녀가 겪어낸 삶의 시간을 함께 걷는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 이후 관객을 향한 마리아의 체념과 절망이 담긴 비참한 물음이 관객에게 던져진다.

 

결국 관객을 향한 마리아의 ‘말 걸기’는 사랑하는 자식을 불행하게 잃어야 했던 그녀의 슬픔을 관객도 절실히 느끼도록 하는 잔인한 극적 장치다.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예수의 사랑과 헌신, 희생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철저히 마리아의 시선에서 구성된 이 뮤지컬은 예수를 호명하지조차 않는다. 예수는 마리아라는 여인의 소중한 자식으로서만 존재한다. 세상과 절대자를 원망하고 절규하는 마리아의 모습 역시 자식을 안고 눈물 흘리는 ‘성모’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녀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평범한 엄마로서, 자식의 죽음에 거룩하고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온몸으로 슬퍼할 뿐이다.


모든 희생은 비극적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세상을, 역사를 바꾸었다 한들 그 희생을 지켜보며 눈물 흘렸던 수많은 ‘마리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영웅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 평범하고 나약하고, 약간은 비겁한 인간으로 살아가더라도 안전하길 원했다.


위험을 감수하며 부조리에 저항하는 삶과, 체념하고 순응하며 무력하게 누군가의 구원을 기다리는 삶. 전자의 삶은 분명 필요하나 자신과 마리아를 해치는 삶이고, 후자의 삶은 나약하지만 자신과 마리아를 세상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삶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옳은가. 극이 끝난 후, 아들에게 어떤 삶을 가르쳐야 할지 고뇌하던 마리아의 질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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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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