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토록 자극적인 발레 공연이라니 - 코리아 이모션 情 [공연]

유니버설발레단 창단 40주년 개막 공연
글 입력 2024.02.2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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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하면 으레 떠올리는 작품이 있다.

 

레오타드, 동글랗고 빳빳하게 퍼진 치마, 토슈즈, 아라베스크 포즈… 우리가 미디어와 공연을 통해 ‘발레’에 대해 듣고 보고 경험한 이미지는 대부분 비슷하다. 실제로 발레는 위와 같은 요소들로 꽉 차 있는, 정통성 있는 무용이니 말이다.



코리아이모션-poster-final.jpg

 

 

이러한 기존의 발레 이미지를 탈피한 공연이 있다.

 

서양 무용인 발레에 국악과 한국의 감정 ‘정’을 담아 크로스오버 시킨 <코리아 이모션 情>은 2024년 창단 40주년을 맞이한 유니버설발레단의 창작 공연으로, 한국적 색채와 선율에 농밀한 발레의 언어를 담아낸 공연이다.


‘국악 크로스오버’와 ‘발레’의 세련된 조화로 한국 창작 발레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수석 무용수 강미선이 지난 해 발레계의 오스카 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우수 여성무용수상을 수상하면서 K-발레의 위상을 드높였기에 더욱 높은 기대를 받은 작품이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발레는 원래 귀족사회에서 추던 춤이었고, 귀족사회의 필수교양으로 유지되었던 무용이어서일까? 우리는 발레를 떠올리면 왜인지 공연 중에서도 유독 부르주아틱한 느낌을 받는다. 발레 공연 관람이 취미라고 하면 굉장히 공연예술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만큼 발레는 장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무형의 이미지와 기대가 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필자 역시 발레 공연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나, <코리아 이모션 情>은 이 ‘장르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부수며 장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여성 무용수는 으레 떠올리는 수직으로 이어지는 원형 치마가 아닌, 한복의 모양새와 비슷한, 차르르 떨어지는 실크결의 원피스를 입고 무대에 올랐으며, 남자 무용수는 딱 붙는 타이즈가 아닌 도포자락을 연상시키는 시스루 계열의 셔츠와 차분한 나무색 바지, 나아가 부채까지 들고 무대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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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퓨전 음악과 발레가 한데 녹여진 공연이기에 처음 공연이 시작되었을 때는 다소 생소한 조합이라 느껴졌다.  내 안에 자리 잡은 ‘발레 장르에 대한 보편화된 이미지’가 완전히 부서졌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나 퓨전 음악과 선을 그리는 듯한 섬세한 몸짓, 눈을 뗄 수 없는 공연연출은 순식간에 공연에 몰입하도록 이끌었다. 공연이 전부 끝나고나서는 본 공연이 국악과 발레가 거의 완성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크로스오버 되었고, 예술 장르와 경계를 허물고 확장시켰다고 단언하며 공연장을 나왔다.


 

1. 한국인의 흥을 담은 화려하고 파워풀한 남녀 8커플의 군무

동해 랩소디 Rhapsody of the East Sea - 앙상블 시나위

 

2. 가야금과 아쟁의 선율 위에 수 놓아지는 드라마틱한 여성 4인무 (Pas du Quatre)

달빛 유희 Dancing Moonlight - 앙상블 시나위

 

3.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형상화한 남성 4인무(Pas du Quatre)

찬비가 Cold Rain - 앙상블 시나위

   

4. 자매 / 모녀의 정을 슬프도록 서정적으로 그려낸 여성 2인무(Pas du deux)

다솜 Ⅰ Dasome Ⅰ - 피터 쉰들러 (Tristesse D` Amour)

 

5. 형제의 정을 아름답게 형상화 한 남성 2인무(Pas du deux) 

다솜 Ⅱ Dasome Ⅱ - 피터 쉰들러 (Prelude)

 

6. 죽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그리움을 표현한 애절한 남녀 2인무(Pas du deux) 

미리내길 Mirinaegil - 지평권

 

7. 남녀의 닿을 듯 닿지 않는 애절한 사랑, 남녀 간의 정을 담은 4커플의 군무

비연 Bee Yeon - 지평권

 

8. 죽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그리움이 애처롭고 아름답게 그려진 남녀 2인무(Pas du deux)

달빛 영 Moonlight Young - 지평권

 

9.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할 장엄한 피날레! 남녀 9 커플의 군무 

강원, 정선 아리랑 Arirang 2014 - 지평권

 


<동해 랩소디>는 자진모리와 드렁갱이 장단에 선율을 주고받으면서 자유로운 즉흥 연주를 통해 축제를 벌이는 곡으로 <코리아 이모션 情>의 서곡을 담당하며, 총 16명의 무용수들의 호흡에 맞추어 한국인의 흥을 담은 군무로 화려하고 파워풀하게 무대를 연다.

 

<달빛유희>는 경기 도당굿의 6박 도살풀이장단을 기본 테마로 가야금과 아쟁이 선율을 주고 받는 곡이다. 깊은 밤 차가운 달빛 아래 조화와 대비, 절제와 분출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안무가 특색이 여성 4인무이다.



2023Korea Emotion-ⓒUniversal Ballet_Kyoungjin Kim 16.jpg


 

필자는 <달빛유희>를 보며 음악과 무대 연출, 안무 3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황홀감까지 느꼈다. 전 곡 <동해 랩소디>에서는 퓨전 공연에 대한 낯섦과 적응의 단계였다면, <달빛유희>는 관객으로 하여금 낯섦에 대한 긴장감은 완화시키고, 무대에 대한 몰입과 클라이막스로 긴장감을 주며 유니버설 발레단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무용수와 우아한 몸짓과 아름다운 무대 연출은 눈을 자극한다면, 선율이 잘 드러나는 ‘영혼을 위한 카덴자’ 음악으로 귀를 자극했다.  이때부터 <코리아 이모션 情> 공연에서만 가능한 특유의 오감 자극을 느낄 수 있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임제가 쓴 시조 ‘한우가(寒雨歌)’를 소재로 만든 곡으로, 평양 기녀의 심성과 마음의 소리를 차가운 비에 비유한 <찬비가>는  클래식 발레에서는 보기 힘든 남성 4인무로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형상화한 춤이다. 남성 무용수 4인이 무대에 등장함과 동시에 여심과 남심 모두를 저격했던 작품으로 ‘한복에 부채는 치트키’ 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부채를 사용한 움직임은 멋스러웠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뛰는 점프와 턴, 현란한 스텝이 더해진 안무는 눈길을 사로잡았다.

 

특히 이전 <달빛유희>는 부드러운 선의 느낌이었다면, <찬비가>는 거친 도화지와 같은 몸짓이라 남성과 여성 무용수의 선을 비교하며 보는 것도 큰 재미였다.

 

 

2023Korea Emotion-ⓒUniversal Ballet_Kyoungjin Kim 3.jpg

 

 

각양각색의 군무는 시시각각 변하는 입체적인 영상 배경과 앙상블을 이루며 오감을 사로잡았고, 남녀 2인무 외에 자주 볼 수 없었던 남성-남성, 여성-여성 군무를 보며 색다른 즐거움과 환상적인 군무의 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비연>은 드라마 ‘짝패’의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된 곡에 네 쌍의 남녀 무용수들이 함께하며 닿을 듯 닿지 않는 애절한 사랑, 남녀 간의 정을 역동적으로 그려낸 춤이다. 어스름한 불빛 아래, 남녀무용수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는 지치지 않는 인간의 기상과 의지를 역동적으로 표현한다. 애절함을 머금은 채 손으로 툭툭 칠 때마다 흩날리는 치맛자락과 바짓자락, 팔과 다리를 힘차게 뻗을 때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모습에서 강한 감정의 고조가 느껴졌다.

 

<코리아 이모션 情>이 클래식 발레와 다르게 특별한 이유는 한국적인 발레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인데, 바로 이 점을 <비연>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클래식 발레에서는 몸을 정수리 쪽으로 길게 끌어올린 상태로 가장 가늘고 긴 선을 강조하며 움직인다. 절제하되 상체를 활짝 펼치며, 유연하면서도 정형화된 동작으로 테크닉을 보여주는 반면 한국적 정서가 깃든 이 작품에서는 손목은 부드럽게, 팔도 조금 늘어뜨리며 가슴이나 어깨, 팔꿈치 쪽에 집중한다. 팔을 감으며 상체를 안으로 둥글게 말고, 한국 무용의 기초 동작인 굴신과 투 스텝 등의 다리 동작들을 많이 사용한다.

 

특히, 턴과 리프트처럼 화려한 동작을 하면서도 잃지 않는 상체의 유연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은 단아함이 느껴져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 요소이기도 했다. 정석 그 자체의 클래식 작품과 차별화를 보여주며, 무용수들의 숨은 기량과 매력이 돋보였다.


 

비탄과 환희, 배신감으로 이어지는 순간적인 감정의 곡예를 절묘하게 풀어가면서 

푸른 달빛 아래 펼쳐지는 문훈숙의 춤은 소리 없는 흐느낌이며 

모든 썩어가는 것들을 초월한 천상의 음악처럼 객석으로 울려왔다.

 

- 누가 이들을 춤추게 하는가, P. 63

 

 

1986년에 창작된 <심청>과 2007년 초연 후 2014년 창단 30주년 기념작으로 리메이크된 <발레 춘향>을 뒤이으면서 K-Ballet 3부작을 완성한 최신의 작품이 바로 <코리아 이모션 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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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정이고 슬픔도 정이며 한도 정이다.

 

‘희로애락애오욕’의 모든 감정이 ‘정’이란 단어에 집약된다고 볼 때 유니버설 발레단이 이를 ‘코리아 이모션(Korea Emotion)’이라 정의한 것은 설득력이 있다. 한국인이 느낀 절실한 정서를 국악의 하모니와 결합하여 75분, 9개 소품 속에 녹여낸 유병헌 예술감독의 안무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필자는 이번 공연을 통해 K-발레가 시그니처 레파토리로 자리 잡고, 또다른 하나의 장르예술이 되기를 바란다.

 

 

 

컬쳐리스트 명함.jpeg

 

 

[권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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