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낭만적 선율을 페어링하다 -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앙상블

글 입력 2024.03.2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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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선율의 페어링


 

짝을 이루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관계들이 있다. 가볍게는 치킨에 맥주, 묵직하게는 와인에 치즈처럼. 그런데 이 페어링이란 것이, 생각보다 만만찮은 일이다. 와인의 예시를 들긴 했지만 사실 나 역시 주류 페어링에 대해선 영 문외한이다. 육류에 레드 와인, 어류엔 화이트 와인 정도의 아주 간단한 도식만 상식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고유의 장점을 해치지 않으면서 합 그 이상의 것을 끌어내기 위해선, 각각의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색다른 맛을 즐기고 싶은 법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새롭게 바라보거나, 혹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때. 그때 필요한 건 뭘까? 바로 전문가의 손길! 빠삭한 그들의 추천을 거친다면, 나로선 생각지도 못한 조합을 통해 감각의 지평이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익숙한 것에는 새로움을, 새로운 것에는 친숙함을 선물하는 능숙한 페어링의 힘.

 

그런데, 이 힘이 발휘되는 영역은 혀 끝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건 지난 주말의 일이다. 낭만적인 선율이 귀를 가득 채웠던,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앙상블'에서.

 

 

[통합 포스터]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앙상블.jpg


 

피아니스트 송영민과 '퍼스트 앙상블'의 연주로 만나 본 이번 콘서트는, 사실 개인적으로는 '나쁠 수가 없는' 공연이었다. 무려 쇼팽과 지브리의 만남이다. 지브리의 음악은 영화의 명성만큼이나 널리 사랑받고 있으며, 나 역시 그 예외가 아니다. 지브리 특유의 동화적이고 드라마틱한 선율을 들으면 언제든 마음이 뭉클해진다. 이번 달 초엔 공교롭게도 지브리의 음악을 주로 맡았던 히사이시 조의 곡을 연주하는 콘서트에 가기도 했다. 쇼팽도 마찬가지. 클래식에 조예가 깊진 않지만 그의 음악들 중 몇 곡은 나름대로 플레이리스트 한 켠에 오래도록 놓여 있었다. 관련 공연을 간 적도 몇 번 있었으니, 나로선 당연히 이보다 반가울 수 없는 조합이었다.

 

다만 한편으로는, 이런 기대 속에서 물음표가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둘 사이의 음악적인 접점을 쉽게 떠올리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100여 년의 격차가 있는 두 음악이 어떻게 맞물릴 수 있을까, 단순히 둘을 나란히 늘어놓는 구성에 그치는 건 아닐까. 더군다나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지브리 음악을 바로 얼마 전에 들은 바가 있어서, 허전함을 느끼고 공연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건 아닐까 살짝 걱정도 되었다.


물론 이런 걱정들을 허심탄회하게 늘어놓을 수 있는 건, 결국 그것들을 모두 덮도록 큰 즐거움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하지 못한 접점을 전문가의 시선에서 잡아채고, 그렇게 잡아챈 것을 모두가 소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놓은 공연. 다시 말해, 이 만남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친절한' 애티튜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친절함을 기반으로 관객들이 무언가 '묵직한' 것을 얻어가길 바라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의도는 적어도 나에게는, 아주 완벽히 들어맞았다.

 

클래식에 대한 문턱을 낮추고, 그렇게 발을 들인 곳에서 모두가 새로운 즐거움을 알아갔으면 하는 마음은 공연의 구성에서부터 잘 느껴졌다. 각 곡의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는 피아니스트 송영민이 직접 들려주는 해설이 꼭 있었다. 곡을 선정한 동기부터, 각 곡이 가진 특징, 곡 사이의 연결성, 대략적인 편곡 분위기까지. 단순히 대중적인 곡들을 붙여두는 것이 아니라, 클래식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일지라도 충분히 그 연결고리를 납득하고 또 뜯어볼 수 있게끔 하는 설명이었다.

 

특히 선곡의 세심함이 돋보였는데, 클래식 입문성의 공연이면서도 쇼팽을 설명할 수 있는 장르를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테마 하나에 쇼팽의 곡과 지브리 음악이 각각 3곡씩 편성되고, 총 두 개의 테마로 공연이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관객들이 들을 수 있는 쇼팽의 원곡은 총 6곡. 조금은 미니멀한 구성이지만 그 안에 쇼팽의 주력 장르였던 왈츠, 녹턴, 에튀드, 폴로네이즈가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다. 쇼팽의 수많은 작품들 중, 무엇을 선보이면 관객들을 클래식의 세계로 초대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다. 장르별 특징에 대한 설명을 들은 직후에 그것을 곧바로 귀로 확인할 수 있으니, '알고 듣는 재미'는 배가 되었다.

 

 

[크기변환] sheet-music-8463988_1280.jpg

 

 

각각 '쇼팽 음악 속에 숨은 지브리 음악', '지브리 음악 속 숨어있는 쇼팽 찾기'로 명명된 테마1과 테마2의 차이를 비교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였다. 테마1에서는 비교적 낯선 쇼팽의 곡을 편안하게 감상한 뒤, 분위기가 비슷한 지브리의 곡을 들으면서 방금 들었던 곡에서의 '지브리'스러운 면모를 곱씹게 되었다. 반대로 테마2에서는 쇼팽 고유의 특징에 유의해서 그의 음악을 접한 다음, 그 특징을 녹여내 편곡한 지브리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 속의 '쇼팽'적인 순간을 찾아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낯선 곡에 점점 익숙해지는 과정을 즐기고 이를 차후의 감상까지로 연장하거나, 귀에 익은 곡의 변주를 즐기다보면 금세 연주가 끝났다.

 

또 그런만큼, 편곡 역시 이번 공연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먼저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피아노곡에 특화된 작곡가다. 그런 그의 음악을 현악기 선율이 더해진 앙상블 버전으로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색다른 감상 포인트가 되었다. 또한 지브리 음악의 경우 보통 극적 연출을 위해 많은 악기가 사용되는데, 풀 오케스트라가 아닌 앙상블 사운드로 그를 접하자 보다 주선율에 집중하게 되면서 음악 그 자체에 더욱 귀 기울일 수 있었다.

 

다양한 감상 요소들을 즐기다보니 순식간에 10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지나고, 어느덧 이 친절한 초대장을 덮어야 할 시간이 왔다. 마지막 곡은 화려한 폴로네이즈 편곡의 '인생의 회전 목마'.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이다. 이번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선택이 있을까 싶었다. 특이하게도 이 곡은 피아노 솔로로 연주되었는데, 폴로네이즈 특유의 화려함이 더해지자 마지막까지 단조롭지 않고 풍성한 사운드가 마음을 꽉 채웠다.

 

쇼팽이 사랑한 춤곡의 숨결이 녹아든 지브리의 음악을, 쇼팽의 영혼과도 같았던 피아노의 오롯한 선율로 감상하고 있으니, 기대와 의문이 뒤섞여있던 처음의 마음은 어느덧 이 순간을 보내주기 싫다는 아쉬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또 동시에 오늘 들은 곡들을 돌아가서 다시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순간 나는 작게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나, 이번 공연의 의도에 아주 착실하게 반응하고 있구나! 하고.

 

그렇게 집에 들어가는 길, 수백 곡이 쌓인 플레이리스트에서 오랜만에 쇼팽의 왈츠를 다시 꺼내 들었다. 쿵짝짝, 하는 왈츠 선율이 새삼스럽게 울려퍼진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떠올렸다. 합을 이룰 때 새로운 감칠맛이 도는 음악이 있고, 쇼팽과 지브리라는 페어링은 두말할 것 없이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을.

 

 

 

황수빈.jpg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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